2021.12.26
영국에서 가장 큰 명절이라고 할 수 있는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사실 나에게 크리스마스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무교) 솔로 기간이 길었기에 알콩달콩할 설레임도 없었고 시끄럽고 복잡한걸 좋아하지 않는 성격 탓에 파티도 없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산타가 없다는 것을 진즉에 깨닫고 부모님께 역으로 꼬마 산타인 척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했던 것 외에는 크리스마스를 특별하게 보낸 기억이 없다. 그것은 영국에 와서도 변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연휴 덕분에 여행을 갈 수는 있었지만 오히려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런데 조던을 만나니 진짜 영국의 크리스마스가 어떤지 알게 되었다. 영국에서 크리스마스는 온 가족들과 친구들이 다 모여 인사를 나누는 가장 큰 명절이었다. 그래서 조던과 연애를 시작한 그 해 크리스마스에는 그의 가족들과 친구들 외에도 친구들의 형제, 동네 이웃들을 다 만났다. 낯가림이 엄청 심한 나로서는 적응하기 힘든 분위기이기도 했는데 한편으로는 정말 영국인들의 생활에 처음으로 발을 들인 느낌이었다.
그렇다 보니 2번의 크리스마스를 덮친 코로나가 영국인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인지 느끼기도 했다. 소셜라이징 좋아하는 사람들이 코로나 때문에 강제적으로 못 만나게 되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 와중에 총리랑 국회의원들은 규칙을 안 지켰던 것이 드러나서 파장이 컸는데, 지역 간 이동도 불가하던 때 총리 (구)측근이 부모님을 방문하겠다고 살던 지역을 벗어났던 때도 큰 일이었지만 최근에 드러난 작년 크리스마스 때 총리와 보수당 의원들이 총리 관저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했던 사실에는 사람들이 찐분노를 했던 것 같다.
아무튼 이렇게 중요하고 큰 명절인 영국의 크리스마스, 내가 조던이와 이번 크리스마스는 어떻게 챙겼는지 소개해볼까 한다.
먼저 크리스마스는 트리와 선물이 가장 큰 요소가 아닐까 싶다. 나는 어렸을 때 받은 미미 인형 정도가 기억나는데 다시 이렇게 20대 후반부터 크리스마스 선물이 부활할 줄은 몰랐네. 늘 감흥이 없는 날 붙잡고 조던이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뭐 갖고 싶어?"라고 물어서 가끔은 난감하다(동시에 선물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도 엄청 힘들다). 게다가 조던이는 부모님과 동생들 3명까지 가족들이 많아서 늘 선물을 포장하고 나면 한가득 쌓인다. 작년까지는 나도 따로 조던이 가족들 선물을 준비했는데 올해는 같이 준비하는걸로 했다. 선물 고르는거 너무 어려워😭 규모를 줄인건데도 트리 아래에 저만큼 쌓였네.
아무래도 크리스마스는 여러 가지 의미도 있겠지만 회사에게는 마케팅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해서 11월부터 관련 상품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크리스마스 케이크, 크리스마스 푸딩, 크리스마스 음료 등등 먹고 마시는게 대부분이다. 우리도 약간 혹해서 크리스마스 케이크 Triple Chocolate Panettone와 Christmas Special Edition Gin을 사봤다. 특히 크리스마스 진은 흔들면 금박이 떠다니는 스노우볼 컨셉인데 병 아래 부분의 버튼을 누르면 조명도 들어와서 신기했다.
겨울이 되면 생각나는 Mulled Wine. 물드 와인을 마셔줘야 제대로 된 겨울을 맞이하는 느낌이랄까. 이전에는 펍이나 길거리에서 사마셨는데 올해는 홈메이드로도 만들어 봤다. 조던이 때문에 우리집엔 각양각색의 향신료가 구비되어 있어서 금방 만들 수 있다. 나는 Star anies(팔각)와 Cloves(정향)를 몇 알 넣고 사과를 베이스로 만드는데 두번째에는 레몬도 함께 넣어줬다. 근데 개인적으로는 과일이 많이 들어간 맛보단 향신료 맛이 더 많이 나는게 좋다. 다음엔 시나몬 스틱도 구해서 또 만들어야지.
이탈리아 크리스마스 케이크로 유명한 '파네토네'. 작년에 한 디자이너 스튜디오에서 일할 때 찐 파네토네를 먹어본 적이 있는데(거래처 공장이 이탈리아였음) 그 때는 술 맛이 강하게 나서 취향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 슈퍼마켓에서 Triple Chocolate 버젼을 팔길래 아무래도 초콜릿은 취하는 맛은 안나지 않을까 싶어 구입해 봤다. 10파운드라는 가격에 비해 케이크가 엄청 컸는데 예전에 먹어본 것과는 다르게 식감이 조금 퍽퍽한 스타일이라 또다시 내 취향은 아니다 싶다. 그래도 작은 조각 와인과 함께 먹으니 좋은 디저트였다.
가끔씩 조던이가 회사에서 선물을 받으면 그 복지가 부러워서라도 정규직 취업이 하고 싶다. 영국에선 또 은근 이런거 잘 챙기는 것 같고 말이지..(회사마다 다르려나) 지금 조던이가 다니는 회사에서 올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치즈와 와인을 한 박스를 보내줬다. La Fromagerie에서 판매하는 다양한 치즈와 레드, 화이트 와인 각 한 병씩, 그리고 크래커와 초콜릿, 꿀이었다. 라 프로마제리는 다양한 치즈와 프랑스 식재료들을 판매하는 곳으로 런던에 세 개의 지점이 있는 유명한 카페 겸 식료품점이다. 갈 때마다 사고 싶은게 엄청 많아서(근데 너무 비싸서 많이 못 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한참을 시간을 보내는 곳인데 이렇게 한가득 받으니 괜히 기분이 좋았다. 조던이꺼가 내꺼고 그러니까 모...ㅎㅎ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에는 조던이가 부모님 집으로 일찍 갈 계획이어서 우리는 23일 저녁부터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즐겼다. 슈퍼마켓에서 산 치킨과 크리스마스 드링크로 함께하는 소소한 저녁. 조던이가 계속 연말 분위기 나는 로맨스 영화를 보자고 졸라대던 터라 넷플릭스에서 <the Holiday>를 봤다. 영화 <Love Acutally>도 조던이가 졸라서 작년 크리스마스 때 처음 봤었지.. 난 케빈이나 해리포터면 충분한 것 같은데 꼭 로맨스라니(긁적). 그래도 로맨스 장르에 큰 관심이 없어서 시작하기가 어렵지 보면 또 몰입은 잘 한다. 이번 영화도 나름 재미있었다.
치킨을 다 먹고 치즈 플라터를 준비했다. 치즈 보드 위에 조던이가 선물 받은 치즈들을 종류별로 담고, 소세지, 햄 올리브도 곁들였다. 친구 예진이가 만들어 준 우드 보드까지 동원해서야 모든걸 다 담아낼 수 있었다. 나는 치즈를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그래도 입맛에 맞는게 있어서 술과 함께 한입 한입 먹다보니 엄청 많이 먹었다. 게다가 올리브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어서 한 통을 다 먹었네. 홀랑 취해가지곤 자기 전에 머리 아프다고 찡찡댔다ㅋㅋㅋㅋ 근데 다음날 숙취 없이 말짱하게 깸ㅋㅋㅋㅋ
조던이와 첫 크리스마스는 조던이 부모님 집에서 2박 3일을 지내며 보냈다(심지어 막내 동생이 나 가는거 아쉽다고 울어서 계획보다 하루 더 있었던😂). 그 외에도 12월 한달 동안 조던네 친구들과 2박 3일 여행도 가고, 주말마다 소셜라이징에 많은 사람들을 만났었다. 아무래도 당시엔 그런 경험들이 처음이었고 영국인들에게 크리스마스가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여서 제안받는대로 다 따라갔는데 이후엔 그게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언어 및 문화적으로도 모르는게 많았지만 나의 성격 자체가 사교적인 스타일도 아니고 낯도 많이 가려서 힘든 부분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한국에서도 나는 친척들과의 교류가 많은 편도 아니고 깊고 좁은 친구 관계를 선호하는데 그와 정반대의 상황을 단기간에 겪으니 어려운 게 당연했다. 그 부분을 깨달은 이후에는 억지로 참기보단 나의 성향도 어필하기로 했고, 작년부터 조던의 부모님 댁엔 크리스마스 당일에만 가기로 했다. 사실 가더라도 난 진짜 귀한 손님으로 앉아서 먹을거 마실거 대접 받아서 불편할 것이 없는데 내 예민한 성격 탓인가 싶기도 하고ㅋㅋㅋ 근데 힘들게 느끼는 부분이 거짓도 아니니 서로 맞춰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이번에도 조던이는 24일 저녁에 일찍 부모님 집으로 향하고, 난 하룻밤을 혼자 보낸 후에 25일 아침 일찍 조던이 부모님 집으로 향했다. 마음 같아선 아침 11시까지 늦잠을 자고 싶지만 조던이는 어린 동생들이 있어서 크리스마스를 일찍 시작한다. 그래, 어린 나이에 뜯고 싶은 선물이 가득 쌓여 있는데 참는건 하룻밤으로도 충분하지.. 동심을 잃어버린 나 같은 어른이나 그게 대수롭지 않지..😂 그래도 벌써 함께 보내는 세 번째 크리스마스인데 매년 동생들이 떼쓰는 횟수보다 기다리고 점잖게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이번엔 정작 나는 일찍 도착했는데 첫째 여동생이 늦잠을 자서 11시 쯤 되었을 때 선물 개봉식을 가졌다.
선물 개봉식 이후 오후 쯤 조던이 부모님이 준비해 주시는 Christmas dinner를 먹었다. 꽤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기다려야 하지만 로스트 한 양고기와 감자, 파스닙 구이, 스터핑(Stuffing) 등을 맛볼 수 있는 유일한 날이기도 하다. 식사 후엔 해가 떨어지기 전에 짧은 산책을 다녀왔다. 조던이 가족을 앞에선 얌전하게 조용히 낯을 가리는 나는 조던이와 단 둘이 있을 땐 재잘재잘 쉴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늦은 밤까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다가 12시가 넘어서야 나와 조던이는 집으로 돌아왔다. 늦잠을 잘까봐 엄청 긴장을 한 탓에 전날 잠을 제대로 못 잤던 나는 눕자마자 뻗어버렸고 오늘 아침 11시까지 아주 딥슬립을 했다는... 어느 나라나 명절은 피곤하구나😂
엄청 피곤했지만 둘만의 선물 개봉식이 남아 있었던 우리는 늦은 시간 조던이 부모님 댁에서 돌아왔을 때 후다닥 남은 선물을 열어봤다. 그리고 오늘 늦잠 자고 일어나서 제대로 다시 정리한 올해의 크리스마스 선물들! 조던이 부모님한테 받은 것도 있었고 서로 선물해 준 것도 있는데, 내가 조던이에게 선물해 준 것은 Bull Dogs 쉐이빙 세트, 한국어 공부 책, 선셋 조명이었다. 조명이 메인 선물이었는데 조던이가 엄청 좋아해서 기분이 좋았다능😚 조던이는 나에게 베이킹 세트(엄청난 풀세트였다), 요리용 저울, 인센스 홀더와 찻잔(내가 좋아하는 '비움'에서 구입!), 23andMe(DNA genetic testing & analysis)를 선물했다. 베이킹은 내가 2022년 New year's resolution 중 하나였는데 이렇게 도구들을 준비해 주니 너무 고마웠다. 갑작스러운 뉴 아이템들로 가득찬 날들, 신난다.
마지막으로 올해 Advent Calendar를 놓친 우리는 스크래치 카드로 대신했다ㅋㅋㅋ 이상하게 올해는 11월 중반부터 애드벤트 캘린더를 구할 수가 없었다. 소소하게 초콜릿으로 만족하려고 했는데.. 대신 조던이가 23일에 장 봐오면서 스크래치 카드를 사왔다. 이틀을 묵혀뒀다가 오늘 벼락 부자를 꿈꾸며 하나 하나 번갈아 가며 긁었는데 결국 당첨된 건 £5. 그래도 사온 값은 건져서 다행인가ㅋㅋㅋㅋ 나는 다시 그 돈을 스크래치 카드에 쓰자함ㅋㅋㅋㅋ
아, 그리고 24일 오전 정말 깜짝 선물을 받았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Home Office로부터!!! (꺄악)
10월 무료 BRP 발급이 승인되었다는 연락 이후로 다른 업데이트도 Local MP도 연락이 없길래 다시금 문의를 넣었는데 이틀만에(그나마 엄청 빠른 답변) 카드를 제작하는데 technical issue로 인해 지연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올해 9월 새로 입학하는 유학생들이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다는 것을 들었어서 쌩뚱맞은 내용은 아니었지만 BRP 카드 없이 1년을 살고 있는 나에게는 무슨 개똥같은 소린가 할 뿐이었다. 그래도 더이상 닥달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수련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긴 했는데 한달이 가까워지도록 또 연락이 없던 것이다. 결국 난 조던이 앞에서 "문의를 또 넣어야 하나?"라는 웅얼거림을 뱉었고 그걸 들은 조던이는 23일에 문의를 넣었다.
사실 그러고도 기대는 없었다. 영국 공무원들이 크리스마스 및 연말 시즌에 제대로 일할 것 같지도 않았고(엄청난 편견ㅋㅋㅋㅋ) 오미크론도 난리인 마당에 1월 중순에 답변이나 받으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24일 아침 꿀잠을 자고 일어나 휴대폰으로 메일을 확인하던 내 눈에 띈 하나의 메일, 'BRP Delivery'. 그래도 크리스마스 이브 아침에도 일하는 성실한 공무원이 있구나, 생각보다 답변이 빠르네, 라고 생각하며 그저 또 다른 변명이나 상황 설명을 예상했던 나는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메일을 읽어나가다 벌떡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나의 BRP card가 배송될 예정이라는 내용 때문이었다. 난 얼른 거실로 나가서 일하고 있는 조던이에게 "이거 메일 좀 다시 읽어봐. 내가 잘못 읽은거 아니지?"라며 메일을 보여줬고 확실한 컨펌까지 받았다.
야호, 드디어 BRP 카드가 온다!😆
농담삼아 조던이와 "난 다른 선물은 다 필요없고 홈오피스한테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딱 BRP 카드를 받으면 좋겠네~"라고 말하곤 했는데 진짜 홈오피스가 선물을 줬다. 비록 이브에 카드가 딱 도착한 것은 아니지만 확실한 답변과 정보만으로 충분하다. 다음주 화요일까진 영국은 휴일이라(크리스마스와 박싱데이 대체 휴일) 배송 예정일은 29일이라 하는데 벌써부터 설렌다. 그 날은 정말 아무것도 안하고 기다려야지. 드디어 영국 밖으로 여행도 마음껏 가고 어디서든 당당하게 신분증을 내밀 수 있다!! 행복해.
'▪︎ 일상 기록장 > 2021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국생활] Day+1928 코로나 일일 확진자 10만명..! (0) | 2021.12.24 |
---|---|
[영국생활] Day+1923 백신 부스터샷(3차 접종) + 아스널 경기들 (0) | 2021.12.19 |
[영국생활] Day+1920 엄청난 해산물 저녁 + 런던 마켓 나들이 (0) | 2021.12.16 |
[영국생활] Day+1913 런던 최애 tea bar를 찾았다 + 드디어 다이슨 청소기 구매! (2) | 2021.12.09 |
[영국생활] Day+1905 런던의 겨울,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0) | 2021.11.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