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11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짧게라도 일기를 자주 쓰고 싶었다. 하루하루의 특별함을 기록하고 싶었고, 특별하지 않은 일상도 남기고 싶었다. 혹은 작은 것으로라도 이야기를 채우고 싶은 마음에 몸을 움직일 나에 대한 동기 부여이기도 했고. 하지만 목요일과 금요일 이틀을 바쁘게 보냈더니 일기를 쓰는 것조차도 힘들만큼 피곤하다. 이전에 직장 생활을 할 때도 느꼈지만, 이래서 직장인들이 퇴근하고 나면 아무것도 하기 싫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거겠지. 겨우겨우 잠을 이겨내며 글자 하나하나를 눌러쓰고 있는 지금도 결국엔 시간으로 따지자면 오전 12시가 넘어버렸다. 하지만 11일 일기로 열심히 써야지.
목요일, 즉 어제는 trial day였다. 이전 일기에서도 말했다시피 알던 pattern cutter 분을 통해서 일자리를 소개받게 되었는데, 런던 베이스의 남성복 브랜드 스튜디오였다. 오랜만의 출근길이라 아침 5시부터 잠을 설치다 엄청 일찍 출발했는데, 스튜디오를 찾느라 조금 길을 헤매었다. 그래도 10분 일찍 도착한 스튜디오는 내가 이전에 일했던 곳들 어디보다도 넓었고 나름 일하는 직원들도 많았다. 브랜드 이름도 그 이름의 디자이너도 일본인은 아니었지만 신기하게도 다른 디자이너 및 직원들이 일본인들인데다(영어보다 일본어 대화를 더 많이 들은 것 같다) 대학 과동기를 아는 사람이어서 세상 좁다 느꼈다. 나를 이곳에 소개해주신 패턴사분도 어제는 근무일이었는지 오랜만에 만나서 인사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좋았던 순간은 거기까지. 내게 주어진 일은 쇼츠 패턴을 제작하여 toile까지 만드는 것이었는데, 분명 보기에는 쉬워 보였던 반바지가 디자인 변경에 따라 얼마나 깐깐해지는지. 패턴 제작에만에도 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었는데, 재단에 샘플까지 제작하려니 정말 쉴 새 없이 일해도 끝이 나지 않았다. 11시에 도착해서 디자이너가 분명 6시까지 일할 수 있냐고 물어봤었는데, 정신 없이 쇼츠를 완성하고 다른 이야기들을 마무리하고 스튜디오를 나섰을 때는 무려 7시 35분. 그 시간 동안 휴대폰을 확인할 잠깐의 시간도 없어 휴대폰을 못 봤더니, 무슨 일이 없으면 크게 연락을 재촉하지 않는 남자친구마저도 7시 30분이 되서는 "다 괜찮은거지? 별 일 없지?"라고 연락이 왔을 정도였다. 하긴, 점심도 제대로 못 먹고 화장실도 한번을 못 갔는데, 흑흑.
그렇게 바쁜 trial 시간을 보내고 바로 업무 이야기가 나왔다. 스튜디오에서 외부의 일로 패턴을 급하게 제작해야 할 건이 있었는데, 그걸 내가 맡아서 해줬으면 좋겠다는거였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다음 날 바로 하기로 했고, 그게 오늘이었다. 오늘도 내가 출근한 이유지. 그 외에도 디자이너가 이 스튜디오에서 패턴사를 고용하는 옵션에 대해 설명해주고(시간 당 페이에 매 주 스케줄을 조율하는 프리랜서 계약직) 만약 내가 그 조건에도 괜찮다면 함께 일하고 싶다고 했다. 난 당연히 좋다고 했다. 결론은 일 구했다! 패쓰! Yeah~
'Patter cutter', '패턴사'라는 직업에 대해 설명하자면, 옷을 만들기 위한 도안(pattern)을 제작, 생산하는 사람이다. 디자이너의 디자인(그림)을 실물로 현실화하는 작업이랄까. 그래서 나는 이 직업을 간단하게 '2D의 그림을 3D의 옷으로 만드는 중간 과정의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작업 특성 상 패턴사는 프리랜서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 스튜디오 입장에서는 새로운 시즌 컬렉션을 준비하는 시즌에는 패턴을 만들고 디벨롭하는 일이 많은 시기에는 패턴사를 필요로 하지만 그렇지 않은 비시즌에는 굳이 패턴사를 고용해서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내가 패턴사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 내가 원하던 라이프 스타일이어서 걱정하는 부분은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타국에서 내가 어떻게 professional pattern cutter로 일의 시작을 할 수 있을까,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패턴사는 아무래도 기술적이고 practical한 능력이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인맥, 네트워크도 중요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패턴사는 스튜디오나 디자이너들끼리 서로 소개해주며 구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과정에서 실무 경험에 대한 증명이 동반되며 커리어가 쌓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이 내가 과연 여기서 그렇게 시작할 수 있을까? 아니면 거의 없다는 패턴사 정규직의 작은 구멍을 뚫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많았는데, 얼레?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었네?
그렇게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왔다니 남자친구가 자기보다 일을 많이 했다며 토닥토닥 해줬다. 그리고 비록 늦은 시간의 저녁이었지만 American BBQ Pork Ribs과 Cheddar Mash Potatoes, Green Vegitables를 사서 (왜냐면 모두 슈퍼에서 파는 pre-cooked foods 였기 때문) 힐링 타임을 가졌다. 그리고 초코 꾸덕한 핫푸딩까지 먹었지.
그리고 오늘은 본격적인 업무의 날이었다, 즉 돈을 받고 일을 하는 날이란거죠. 하지만 일이 꼬이려던 건지 아침부터 tube가 중지되고 지연되는 바람에 계획했던 시간보다 30분 늦게 도착했다. 원래는 10시 30분에서 6시 30분까지 업무 시간이었는데, 11시에 시작했기 때문에 제 시간에 마치려면 속도를 내야 했다. 오늘 내가 해야했던 일은 Vest와 Long Shirt Dress 패턴을 tracing하는 것이었다. 어려운 패턴은 아니었지만, 시작하고 보니 패턴 조각들이 상당히 많았다. 점심도 10분만에 샌드위치로 때우고 또 다시 화장실 한번 가지 않았지만, 결국엔 오늘도 시간이 오버되어 7시 30분까지 일한 데자뷰 같은 하루가 되었다. 사실은 7시부터 집에 가면 안되나, 무조건 일을 다 끝내야 하나, 하루만에 끝낼 수 있는 일의 양이 아닌데, 하고 끊임 없이 생각했다. 그래도 최대한 일을 다 끝내려고 한편으로는 8시까지 일을 할 각오도 했다. 하지만 보스가 퇴근하려고 하길래 슬쩍 운을 떼며 물어봤더니, 엄청 쿨하게 두 가지 옵션을 주는 것이 아닌가. 집에 가져가서 해오거나, 아니면 월요일에 와서 하거나. 월요일에 와서 계속해도 되는거였으면 진즉에 집에 갔을텐데, 난 또 엄청 급한 줄 알았지. 아무튼 남은 일이 많지 않았고 집에 가져가서 일을 마치더라도 결국엔 스튜디오에 배달을 와야 할 것 같아서 월요일에 와서 마무리 짓겠다고 했다.
그러고 또 집에 도착하니 8시가 넘는 시간에 온 몸에 근육통이 오듯이 피곤함이 몰려왔다. 게다가 오늘부터 월요일까지 남자친구는 친구들과의 여행으로 집을 비웠기 때문에 비어있는 집이 더 아쉽게 느껴졌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10시가 되고 11시가 되고. 몇 번이나 일기를 쓰려고 화면을 들여다봐도 피곤함이 계속 몰려와서 이 하루의 일기를 쓰는데도 엄청 오래 걸렸다.
아무튼 요 이틀 나의 일정은 이러했다. 정신 없이 지나갔고, 그 시간의 흐름을 몸의 피곤함으로 느끼고 있다. 집에서 떠나서 일에 집중하는 시간을 오랜만에 가지게 되는 것도 좋고, 다시 패턴을 만들게 되서 좋다. 비록 아직까지는 고정적인 일정이 있는 단계는 아니지만 처음으로 professional pattern cutter, entry level로서 시급을 받으며 일하는 기회가 생긴 것이 나에게는 의미가 깊다. 더이상 인턴이나 어시스턴트가 아니야! 이 기회가 앞으로의 좋은 시작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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