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15
벌써 조단이와 함께하는 세번째 발렌타인 데이가 되었다.
첫 발렌타인 데이는 금요일이었나. 조단이 퇴근 시간에 맞춰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저녁을 먹었다. 난 그래도 로맨틱한 첫 이벤트 날이라고 작은 선물을 준비했는데 조던이는 꽃다발 하나 사오지 않아서 내가 투닥거렸었지. 퇴근하고 지하철타고 오는데 꽃다발 들고 오기가 부끄럽다나 뭐라나. 여자들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사오는 그 마음을 좋아하는지 모르고.
두번째 발렌타인 데이는 내가 한국에 가서 떨어져 보냈다. 세 달을 혼자 있을 조던이가 안타까워 난 집안 곳곳에 퍼즐 모양의 조각 퀴즈들과 선물들을 숨겨놓고 발렌타인 데이부터 화이트 데이까지 장장 한 달 가량 숨은 퀴즈 찾기 이벤트를 준비했다. 나 혼자 한국 오기 전 꼼실거리면서 이벤트를 준비했는데 그 동안 조던이는 전혀 몰랐다는거, 그게 너무 웃겼다. 집안 곳곳에 숨기면서 '얜 절대 내가 알려주기 전까지는 모를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예상 적중이었지. 조던이는 그냥 인터넷 카드 하나 보냈던가(이 쉬키가ㅋㅋㅋ).
여자가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초콜릿 선물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한국에 비해 영국에서 발렌타인 데이는 그저 커플들을 위한 로맨틱한 날이다. 더욱이 화이트 데이가 없다보니 영국에서 발렌타인 데이는 오히려 남자 쪽에서 어필하는 느낌이 크달까.
근데 조던이는 연애 경험도 나보다 많은거에 비해 발렌타인 데이에 별 생각이 없길래 도대체 과거엔 뭘 했냐 물어보니 "사실 난 전에 이렇게 발렌타인 데이를 챙겨본 적이 없어."라는 안전한(?) 대답을 했다. 진실을 확인할 수도 없지만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 특별한 이벤트 때 꽃다발 하나 사오는 센스 정도도 입력(?)되어 있지 않은 남자여서 요란법석 떠는 연애를 안했음을 절로 느낄 수 있어서였다. 그에 비해 난 약간의 요란은 떠는 스타일이라ㅋㅋㅋ 조던이도 점점 내 취향을 맞춰주는 남자로 발전하고 있다.
아무튼 2년 동안 발렌타인 데이를 챙겼더니 지쳐버린 나는(이젠 아이디어도 없음..) 올해는 무던히 지나가리라 생각했다. "올해는 내 차례 아니지? 난 아무것도 안할건데 그럼 이번 발렌타인은 심심하게 넘어가겠네~"라며 조던이에게 은근 도발은 했지만. 조던이가 왜 자기는 아무것도 안할거라 생각하냐며 응수했지만 솔직한 마음에서 기대가 없었다ㅋㅋㅋ 발렌타인 데이가 평일이기도 했고.
그러던 어느 날 발렌타인 데이가 다가오는 주말 저녁에 레스토랑을 예약한 확인 메일을 받았다. 레스토랑 예약은 하려고 했나 보다 싶어 기분 좋으면서도 예약 내역을 떡하니 보낸 것이 우스워 문자로 레스토랑 이름을 보냈더니 "으악! 예약한 거 어떻게 알았어?"라며 달려오던 조던이ㅋㅋㅋ 실수가 있었는지 확인 메일 주소를 변경했는데도 우리가 같이 사용하는 메일 주소로 연락이 온 것이었다. 결국 서프라이즈로 계획을 오픈하려던 조던이는 실패하고 난 한동안 그의 실수를 놀렸다.
그리고 당일이었던 지난 주말. 아침 일찍 운동을 다녀온다던 조던이의 부지런함에 감탄하며 난 여전히 침대 속 온기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가 현관벨을 누르는 것이 아닌가. 배달 올 택배도 없고 더욱이 주말 오전에 누가 방문할 일은 없어서 무시를 하고 싶었는데 벨소리를 두 번 이상 눌러서 결국 나가보게 되었다. 그리고 문 앞에 서 있던 것은 엄청 큰 꽃다발을 든 조던이!
네, 부끄러워서 꽃다발을 못 사오겠다던 남자는 미리 예약해서 토요일 아침 꽃다발을 픽업해오는 남자로 발전했습니다.
엄청 다양한 꽃들이 있는 큰 꽃바달을 사와서 아침부터 엄청 놀라기도 했고 너무 행복했다. 레스토랑 서프라이즈는 실패했지만 꽃다발 서프라이즈는 대성공이었다❤️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었던 이유가 있는게, 오후에는 전시 예약을 해두어서 일찍 길을 나서긴 해야했다. 그러다 보니 줄 타이밍이 아침 밖에 없었던 듯. 덕분에 하루의 시작을 서프라이즈와 함께 시작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우리가 예약해 둔 전시는 Royal Academy에서 전시 중인 Francis Bacon 전시회였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조던이도 좋아하는 작가여서 전시회를 놓치기 전에 후딱 갔다. 내가 최근엔 일기만 계속 쓰고 있는데(다른 사정이 있어서..) 빨리 써야하는 전시 후기들도 많고 봐야할 전시들도 많은데 계속 밀리고 있다, 흑흑. 그래도 정기적으로 보는 미술 전시회들 너무 좋아..
전시를 다 본 후에는 점심을 먹으러 갔다. 처음엔 샌드위치 먹을까?로 시작된 제안은 Whole Foods Market에 가보자, 로 변경되었다가 Japan Centre는 어때?까지 발전되어 결국엔 재팬 센터에서 밥을 먹었다. 사람이 많아서 복잡하긴 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먹은 일본식 카레는 맛있었다.
이후엔 내가 들러볼 상점이 있어 Vicotria역이 있는 동네까지 걸어가 카페도 가고 산책도 즐겼다. 그러다 그 동네에 있던 고급 식료품 점도 가봤는데 너무 예쁘기도 하고 본 적 없는 별별 신기한 식재료들이 있어 좋았다. 난 특히 이렇게 가지런히 정리해 둔 식재료들을 보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데, 색감도 너무 예쁘고 더 탐스럽고 맛있게 느껴지는 것 같다. 물론 가격은 사악해서 아무것도 사오지 못했다(그리고 들고 다닐 힘이 없었음ㅋㅋㅋ).
저녁 식사 전까지 시간이 남아서 그 전에 타이밍이 맞으면 Primrose Hill에서 선셋을 보자, 라고 했는데 하필 우리가 내리고자 했던 지하철 역이 닫아버려서 그 전 정거장에 내려 한참 걸어야만 했다. 원래 계획대로 내렸어도 선셋 시간에 간당간당했는데 지하철 한 정거장을 더 걸어야 했으니 예쁜 선셋을 보기에는 너무 무리였다.
아쉬운 마음에 언덕에 올라 살짝 보이는 선셋과 야경의 불빛을 즐겼지만 바람이 꽤나 불어서 아쉬웠다. 하루 종일 밖을 다녔는데 저녁이 되니 확실히 춥더라. 후다닥 언덕 위에서 사진을 찍고 내려와서 저녁 예약 시간까지 펍에서 와인 한 잔을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 Odette's Restaurant
Address : 130 Regent's Park Road, London NW1 8XL
Open : Wednesday - Friday 12:00 ~ 14:30, 18:00 ~ 21:00 / Saturday - Sunday 12:00 ~ 14:30, 18:00 ~ 21:30
Monday, Tuesday Closed
Website : http://www.odettesprimrosehill.com/
조던이가 골라 골라 예약한 레스토랑은 프림로즈 힐 바로 근처에 있던 Odette's Restaurant. 구글 평점이 무려 4.7점에 달하는 모던 유러피안 레스토랑으로 겉에서 보기엔 작고 아담해 보였지만 안쪽으로 넉넉한 공간이 있었다. 분위기부터 너무 내 취향이었지.
메뉴는 Tasting Course와 A la Carte가 있었는데, 우리는 테이스팅 코스도 궁금했지만 결국엔 원하는 메뉴를 쏙쏙 골라 먹기로 했다. 조던이가 "우리 3 코스로 주문할거지?"라고 해서 각자 스타터, 메인, 디저트를 골랐다(그래, 많이 걸었으니까 에너지가 필요해!).
조던이는 스타터로 Beef, mushroom, gherkin(Beef tartare 메뉴), Pork, cauliflower, apple(Pork belly, glazed cheek 메뉴)를 선택하고 나는 Artichoke, walnut, truffle(Jerusalem artichoke royale 메뉴), Market fish, mussel, celeriac(Market fish-cod 메뉴)를 선택했다. 사실 육류와 살짝 고민했지만 고급진 레스토랑에 온 만큼 좀 더 독특한 재료들을 사용한 음식을 먹어보고 싶어 도전하듯 선택했다.
빠르게 와인과 빵부터 세팅되었는데, 빵부터 너무 맛있었다. 물론 치즈로 채운 슈(정확한 이름은 듣지 못함)는 내 취향이 아니어서 반틈만 맛 보고 조던이에게 다 주었지만😂 곡물빵은 보슬보슬하니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곡물을 바닥에 깐 작은 그릇에 빵을 얹은 플레이팅도 마음에 들었다.
이내 곧 서빙된 메뉴들은 너무너무너-무 맛있었다. 여전히 Masterchef: The Professionals를 즐겨 보는 조던이와 나는 이번에 먹은 메뉴들이 그 프로그램에서나 봤던 파인 다이닝 메뉴 갔다며 호들갑을 떨었지ㅎㅎ 플레이팅도 예쁘고 여러 재료들을 다양하게 요리해서 각각의 맛을 즐기는 것이 새롭기도 했고 즐겁기도 했다.
나는 예전에 프랑스를 여행할 때 육회와 같은 타르타르에 대한 경험이 좋지 않았어서 그 이후로 잘 먹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에 조던이가 주문한 타르타르는 정말 맛있었다. 역시 좋은 재료로 잘 만들면 맛있는 요리구나 했음. 내가 주문한 것은 예루살렘 아티초크(돼지 감자와 비슷한 종류의 뿌리 채소라고 한다) 로얄(젤리 같이 굳힌 형태인 듯)을 트러플과 호두, 콩소메와 곁들인 것이었는데 맛이 earthy하다고 해야하나, 확실히 대지, 땅과 관련된 재료들을 사용해서 그런 맛이 났다. 사실 돼지 감자나 호두 등 내가 엄청 좋아하는 재료들은 아닌데 다양한 조리법이 식자재에 대한 새로운 맛을 느끼게 해준 것 같다.
그리고 조던이가 주문한 메인 메뉴는 여러 부위의 돼지 고기를 함께 나온 소스들과 함께 곁들여 먹는 것이었다. 고기 요리니 무슨 다른 말이 필요하겠는냐만은.. 나의 생선 요리도 엄청 부드럽고 특히 소스가 엄청 마음에 들었다. 셀러리악이라는 야채도 들어만 봤지 먹어보긴 처음이었는데 맛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번 저녁에서 우리를 홀딱 반하게 한 것은 디저트였다. 식사를 마치고 한참을 고민하던 우리는 Banana, tonka bean, passion fruit(Banana souffle, sorbet)를 선택했다. 서로 다른 메뉴를 고를까 했지만 그동안 마스터 셰프를 보며 가장 궁금하던 수플레를 발견했는데 하나로 나눠먹기 애매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지.
수플레는 너무너무 맛있었다. 사진을 다시 보는 지금도 그 맛과 부드러움이 생각날 정도. 왜 마스터 셰프에서 그렇게 심사의원들이 수플레만 나오면 흥분을 하고 저렇게 봉긋 잘 솟은 수플레에 기뻐하는지 알 것만 같았음. 정말 다음에 또 먹고 싶다.
그렇게 저녁 데이트를 마치고 나와 조던이는 집으로 돌아왔고, 난 마저 찍지 못한 꽃사진을 마음껏 찍었다. 비록 이름은 모르지만(흑흑) 다양한 꽃들이 있어 요리 보고 저리 봐도 예뻤다. 근데 엄청 키가 크게 만들어준 꽃다발인데다 중간에 나뭇가지 꽃도 있어서 길이를 자르기가 너무 힘들었다😂 겨우 꽃들만 조금 잘라 키를 조절하고 화병에 넣었는데, 조만간 꽃을 분리해서 조금씩 꽂아줘야 할까봐.
예쁜 꽃들 마음껏 보고 가세요~ 하하. 수국도 있고 라넌큘러스(처럼 생긴 꽃)도 있고 튤립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꽃들이 한가득이어서 너무 행복했다. 은근 비용이 비쌌을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조던이는 기꺼이 괜찮다며 로맨틱한 면모를 보여줬다.
그리고 사실 여기엔 다른 뒷 이야기도 있다. 조던이가 서프라이즈를 꿈꾸며 운동을 나가겠다고 하얀 거짓말을 할 때, 나는 속으로 '좋았어, 조던이가 운동 다녀와서 샤워하면 미리 준비해 놓은 선물(!)을 포장하고 카드를 써야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존을 통해 미리 주문했던 선물은 이미 진즉에 도착해 있었는데 포장 타이밍을 노리며 숨겨둔 것을 그 날 아침에 하려고 했건만 조던이의 서프라이즈로 나의 계획은 저 멀리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지.
하지만 다행히 조던이가 "아침으로 먹을 빵 사올게, 조금만 기다려~"라며 다시 나갔다 오는 사이에 후다닥 선물 포장과 카드를 준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침부터 꽃다발을 받아 발렌타인 데이 분위기가 조성되었기에 언제 선물을 줘야하나 고민하던 것도 해결이 되었다. 돌아온 조던이에게 "나도 선물을 준비했어!"라며 줬는데 기대하지 않았는지(올해 난 아무것도 안한다고 선언을 했던지라ㅋㅋ) 좋아했다.
내가 준 선물은 와인 병따개. Alessi 디자인 제품으로 Anna.G 였나, 이름이? 사실은 선물을 가장한 내 사심 채우기였는데, 발렌타인 데이가 꼭 누구 한쪽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보니(그리고 그런 선물은 지난 번에 했었고) 이번에는 우리 둘을 위한 선물을 사고 싶었다. 앞으로 허니문 하우스에 살게 되면 이런 귀여운 제품이나 소품들로 하나 둘 채워가고 싶은 로망이 있었는데, 이렇게 시작해볼까 해서.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사온 와인에 바로 서보았던 와인 오프너. 이제 엄청 힘겹게 와인 따지 않아도 된다, 휴.
너무너무 즐겁게 보낸 주말 발렌타인 데이 데이트였다. 이렇게 꽉 차게 보내서 일요일은 하루 동안 골골댔지만(그 날 밤에 잠을 푹 못 잤다, 흑흑) 나랑 조던이의 행복이 꽉 찼던 이 날의 기운이 계속 계속 이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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