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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 기록장/2021년

[영국생활] Day+1742 남자친구의 생일

by kyeeunkim 2021. 6. 21.

2021.06.20

  오늘은 남자친구 생일이었다. 오전 12시 땡하는 순간에 나한테 축하받고 선물 중 하나를 먼저 열어보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더니, Aēsop 선물을 확인하곤 마음에 든다며 좋아했다. 하지만 밤늦은 생일 celebration은 여기까지였다. 오전 일찍 백신 예약이 있었기 때문에 술도 못 마시고 늦은 시간까지 놀 수도 없었다. 생일이 있는 주말에 아쉬움이 남지만 그래도 아침에 일어나면 얼른 씻고 외출 준비를 마쳐서 예쁜 카페에 브런치를 먹으러 가자며 알람도 딱 맞춰놓고 잠들었다.

  하지만, 하아, 지금 생각해보면 이게 오늘 하루의 복선이었나 보다. 잠들기 직전 '나도 알람을 맞춰놓을까?' 생각을 하다 워낙 알람 소리를 잘 듣는 남친을 믿고 그냥 잠들었는데, 아침에 기억나는 남자친구의 한마디, "9시 15분?". 아침잠이 많은 나도 이런 경우엔 정말 침대에서 튀어 오르듯이 깨어나게 된다. 휴대폰에 남은 기록은 missed alarm, 남자친구는 일생에 알람을 못 들은 적이 처음이라며 너무 황당해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생각을 할 수 없는 시간이어서 그나마 일어난 시간이 9시 50분이 아닌게 어디냐며, 씻을 정신도 없이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두번째 함정. 요 몇 일 낌새가 수상하더니 아침부터 생리가 시작된 것이다. 만사가 피곤해지는 상황에서 그래도 급하게 옷을 껴입고 길을 나섰는데, 보통 때는 멀지 않게 느껴지는 거리건만 마음 급할 때는 꼭 멀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걸어서 20분 거리로 분명 예상했는데, 아무리 빨리 걸어도 거리가 가까워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급한 마음에 빠른 걸음으로 걷다보니 머리가 어지러운 느낌도 들고. 겨우겨우 예약 시간에 맞게 백신 센터에 도착해서 남자친구는 바로 입장하고 나는 밖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리고 여기서 함정 셋. 집을 나서기 전에 확인한 일기 예보에는 오후까지 비가 내리지 않는 흐림이었는데, 내가 기다리는 동안 추적추적 가랑비도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쓰기에도 애매하고 안 쓰기에도 불편한 그런 비. 하늘은 여름이라고 느낄 수 없는 우중충한 회색빛에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옷들을 입고 지나치고 있으니 내가 갑자기 3월이나 9월 날씨 중간에 서 있나 하는 느낌도 들었다. 그래도 30분 정도 기다리자 남자친구가 백신 접종을 마치고 15분의 waiting time도 보낸 후에 센터에서 나왔다. 모더나 백신을 맞았는데 주변 가족이나 친구들이 모더나를 맞은 경우를 잘 보지 못했다며 신기해하면서도 신나하던 남자친구. 사실 나보다도 백신 접종을 더 오래 적극적으로 기다렸어서 이해되는 마음이었다. 그래, 너가 좋으면 되었지. NHS에서 생일 선물처럼 백신 맞는 느낌이려나, 하지만 정작 접종해준 의사분들은 생년월일을 확인하는 상황에도 날짜를 알아채지 못했다고.

  집에 돌아와 남은 선물들을 다 열어보며 잠깐 해피 버스데이 타임을 가지고 늦지 않게 브런치를 먹기 위해 외출 준비를 했다. 일주일 전부터 집 근처 동네 카페 중에 음식도 맛있어 보이고 분위기도 딱인 예쁜 카페를 하나 찾아놓았다. 하지만 도착한 카페에는 거의 8팀이 대기하고 있는 긴 줄이 있었다. Google Maps에서의 평도 워낙 높고 주말에 예약을 받지 않는다고 하길래 인기가 많은 것은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이미 리서치할 때부터 주변엔 이만한 카페나 브런치 식당이 없는 것을 알았던 나는 결국엔 왔던 길을 되돌아가 다른 카페를 찾아야 했고, 그 카페에서도 겨우 잡은 자리는 불편한 자리여서 아쉬움이 남았다. 주문한 오믈렛과 엔초비, 오리 리예트는 맛있었지만, 오늘 하루의 계획이 계속해서 차선을 선택하게 되는 느낌이어서 아쉬움이 컸다.

급하게 찾아 들어간 다른 카페에서의 브런치

  하지만 무엇보다 나의 컨디션, 몸이 제일 문제이긴 했다. 생리가 시작하면 첫날, 이튿날을 제일 고생하는 사람으로서 아무리 애를 써서 텐션을 올리려고 해도 모든 일이 너무 피곤했다. 비가 오고 흐리니 다른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백신 접종까지 했으니 엄청난 음주가무를 즐길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으니(서로 이번 주말엔 그렇게 보내기로 암묵적인 약속이 된 상황) 무엇인가 신나고 재미있는 생일을 만들어 주지 못하는 상황이나, 몸도 아프고 피곤해지는 상태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조금은 버거운 하루였다. 재미있는 파티를 만들어 볼려고 풍선도 사고 웃긴 생일 선글라스도 사고 핸디 폭죽까지 준비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후에는 남자친구 부모님 집에도 방문했는데(사정이 있어서 남자친구의 어머니랑 다른 동생들은 다른 집에서 쉬고 남자친구의 아버지랑 첫째 동생만 만났다.) 사실 나는 남자친구 부모님 댁에서 엄청 수다스럽지는 않아서 축구 경기만 주구장창 보다 왔다. 아직은 역시 남자친구 가족들이랑 어색한 느낌이랄까. 되게 친절하고 잘 해주시지만 나에겐 아직 어려운 느낌이다. 서로는 결혼까지 약속한 진지한 관계이지만, 아직 나의 입장으로서는 우리 부모님께 남자친구를 정식으로 소개시켜 드리지 못한 상황에서 계속해서 남자친구 부모님을 찾아뵙는 상황이 불편한 것 같달까. 남자친구와 그의 가족들은 나를 거의 가족처럼 대해주지만 내 마음이 그만큼 미치지 못하는 애매한 상황이다. 괜히 남자친구 가족들이 나를 가족처럼 생각해주는 것만큼이나 나에게 가족으로서의 기대도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들다 보니 내가 어느 위치에 있어야 하는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망할 코로나, 계획대로였다면 작년에 이미 남자친구와 한국을 방문해 가족들과 인사도 했다면 이런 혼란이 내게 남지 않을텐데.

  이후 저녁에는 집으로 돌아와 남자친구가 먹고 싶어하는 치킨을 주문해서 영화를 보며 편안하게 쉬는 힐링 타임을 가졌다. 마지막에 잠들기 전에 남자친구가 "좋은 생일을 만들어 줘서 고마워."라고 했지만, 나는 오늘 하루 작은 계획마저도 틀어지고 상황적으로나 컨디션으로나 스트레스 받는 상황들이 생겨서 버거운 마음에 남자친구에게 즐거운 생일을 만들어주지 못한 것 같아 속상한 기분이 들었다. 영국 날씨마저 도와주지 않으니, 뭔가 가장 우중충한 하루를 보낸 것 같다. 흑흑 일기를 쓰며 다시 되새겨보니 너무 슬프고 속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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