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3
지난 밤과 오늘 오전, 나와 남자친구 사이에 첫 argument가 있었다. 언제나 모두에게 그렇듯 문제의 시작은 매우 사소한 것이었는데, 친구집에 놀러가 축구 경기를 보고 온다던 남자친구의 귀가가 늦은 것이다. 하지만 어제 일기에도 쓴 것처럼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늦어지는 것은 나에게 큰 문제가 아니다. 원래 나의 성격은 친구 만나 놀 때 중간 중간에 계속 연락을 요구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조금 늦어진다고 해서 걱정을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사소한 문제는 밤 12시가 가까워지는 시간이 되면서 갑자기 달라졌다.
나와 남자친구의 마지막 연락이 저녁 7시 즈음 '이제 친구 집으로 가, 나중에 집에서 봐.'였던 것과 그 날이 일주일의 중간, 평일이었다는 것이 많은 것을 달라지게 만들었다. 평소 평일에 취침을 준비하는 12시가 가까워지도록 내일도 출근을 하는 남자친구는 돌아오지 않았고 마지막 연락으로부터 다섯 시간의 공백이 몇 분 차이로 나에게 엄청난 불안함을 안겼다. 그리고 온갖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는 나의 상상력도 한 몫을 했겠지. 방 안에 가만히 앉아 닿지 않는 연락을 그에게 하며 수동적으로 그의 응답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입장은 나를 너무나도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는 평소에 휴대폰을 잘 확인하지 않아, 무음을 해서 확인을 못하겠지.'라는 이성적인 생각만으로는 '그래도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 것이면 어쩌지.'라는 나의 불안을 모두 잠재울 수 없었고, 나는 결국 그의 친구에게 연락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때의 비참함이란. 남자친구가 친구와 놀 때 방해를 하는 여자친구가 되고 싶지도 않았고, 그와 연락이 닿지 않아 친구에게까지 닥달하는 그런 여자친구는 더더욱이 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몇 번 만나 같이 어울린 친구라고 하더라도 늦은 시간에 나의 베프에서 연락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과 다른 입장일 수 밖에 없고, 연락하기 전에도 수십번을 망설이고 생각하다 겨우 연락을 보냈을 때 친구의 답변을 기다리는 몇 분동안 난 '혹시나 그가 남자친구는 이미 우리 집을 떠났는데? 라고 답장하면 난 그 이후로 무엇을 해야하지?'라는 생각과 함께 최악의 시간을 보냈다. 물론 다행히 별 일은 없었고, 그는 여전히 친구와 있었다. 정확히 어떤 상황이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그 즈음 집으로 돌아올 채비를 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한번 터져버린 감정에 그가 Uber를 타고 돌아오는 동안 나는 엄청나게 울었고 그 우울한 감정은 별의 별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물론 이 일이 단순히 지난 밤 한번 때문만은 아니었다. 휴대폰을 무음으로 해두고 보통 휴대폰을 잘 확인하지 않는 그의 습관으로 나는 그동안 문자나 전화 연락을 통해 그와 바로 닿을 수 없는 여러 번의 불편함을 겪어왔던 터였다. 게다가 내가 그와 함께 살지 않을 때는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걱정할 일은 없었다. 따로 살 때는 그가 몇 시에 돌아오는지 알 일도, 확인할 마음도 없을 나로서는 마음 편하게 잠에 들었겠지. 하지만 함께 살게 된 이후로 옆 자리가 비어있는 순간을 실시간으로 경험하는 나로서는 집에서 그의 안전을 걱정하며 기다리는 입장이 되고, 그는 여전히 평소처럼 중간 중간 연락하지 않고 실컷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온 것이다. 더 즐겁고 행복하자고 함께 살기를 결정했는데, 나만 변해버린 것 같은 생활이 너무나도 싫었다. 절대 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의 모습이 되어가는 것 같아서 비참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렇듯 나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났다. 침대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생각을 이어가는 동안 수도 없이 '이번에는 꼭 말해야지. 절대 이렇게 하지 말라고 말해야지.'라며 되내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나의 성격적 결함 때문인데, 나는 평소에도 아주 가까운 사람들과 나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운 사람이다. 심지어 부모님에게도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어려워 늘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는 말보다 눈물이 먼저 나오곤 한다. 게다가 한번 뱉은 말은 다시 되돌릴 수 없고, 가끔은 말이 엄청 날카로운 무기가 되는 것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많이 겪어온 나로서는 그러한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많은 가시를 나 스스로에게 돌리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다. 그러다보니 집에 돌아와 작게 인사하는 그에게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얼굴을 멍한 표정으로 잠깐 확인하고 돌려 누울 수 밖에 없었다. 남자친구는 남자친구대로 '집에 돌아왔더니 여자친구가 엄청 화나 있네? 그런데 그 이유를 전혀 말해주지 않아!'가 되어버려 서로 기분이 상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러면서 그가 "왜 화났어? 왜 지금 기분이 안 좋아?"라고 몇 번이나 되물었는데 이미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대다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 나로서는 그의 질문에 더욱 입이 막혀버렸다. '아니, 지금 정말로 내가 <왜> 기분이 안 좋은지 몰라서 그러는거야? 그 말투는 내가 전혀 화낼 상황이 아닌데 화난 것처럼 들리잖아. 그럼 진짜 내가 전혀 화날 상황이 아닌데 화난 쫌생이인건가? 내가 잘못된건가?'라는 수많은 물음표와 함께 나의 입은 꽉 다물어졌다.
나의 입이 좀처럼 열리지 않자, 그도 기분이 상한 탓인지 방을 나갔다. 나는 기분이 상했지만, 그래도 다음날 출근하는 그의 잠자리가 최소한 편해야 할텐데 싶어 내가 늦게 잘테니 침대로 가 자라고 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왜 기분이 안 좋아?"라고만 물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몇 시간을 서로 다른 공간에서 대치하다 나도 짜증이 솟아 새벽 2시쯤 침대로 돌아와 잠에 들었다. 그런데 오전 7시쯤 깨어나보니 여전히 옆자리가 비어있는 것이 아닌가. 거실 쇼파에서 자고 있는 그를 깨워 우선 잠이라도 침대에서 마저 자라고 데려왔는데 단 두어시간이라도 제대로 잠을 잤을지는 모르겠다. 9시 출근 시간이 되어 그는 일어나 거실의 재택 근무 공간으로 갔고, 나는 작은방에서 서로 말 한마디 없이 오전 시간을 보냈다. 정말 2년이 다 되어가는 기간 동안 처음으로 서로를 무시하고 말 한마디 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점심 시간이 가까워질 때 남자친구가 갑자기 집을 나갔다. 점심을 해먹자는 말을 못하겠으니 사먹으러 나가나보다 싶어 나 또한 신경쓰지 않고 샤워를 했다. 샤워를 마치고 거실로 나가 잠깐 물을 마시고 딱 뒤를 돌아섰더니 쇼파에 앉아있던 남자친구가 옆에 둔 꽃다발을 들며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네 기분을 상하게 해서 미안해."라며 화해의 제스쳐로 꽃다발을 내밀었다. 그냥 그 한마디가, 나에게 다가오는 그의 걸음이 왈칵 눈물을 쏟게 했다. 여전히 내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아 저녁에 이야기를 하자고 했지만, 그는 "난 지금 대화하고 싶어. 일에도 집중 못하고 아무것도 못하겠어."라며 결국 점심 시간을 틈타 서로 이야기를 할 시간을 가졌다.
나는 지난밤 느낀 감정을 천천히 꺼냈고, 이성적으로는 모든 상황과 이유를 이해하지만 감정적으로는 너무 힘들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지난밤 일어난 모든 상황과 내가 했던 행동들, 그리고 그것에서 오는 감정들이 결국엔 모든 일이 내 잘못으로 돌아오는 것 같은 나 스스로에 대한 자책으로 더욱 이야기를 꺼낼 수 없게 만들었다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하는 나의 이야기를 그는 차분히 들어줬고,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면서도 "내가 미리 연락하지 못해서 미안해. 앞으로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게."라며 사과했다. 한편으로는 나는 나 때문에 누군가의 생활 습관 혹은 편하던 행동을 바꾸게 하는 것도 싫어서 더욱 이야기를 하기 싫었다고 했는데, 그는 "아니야. 난 너가 계속 이야기해줬으면 좋겠어. 나는 너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내 행동을 바꾸고 싶어."라며 서로 더욱 많이 이야기하자고 했다.
거의 2년이 다 되어가는 기간 동안 나와 남자친구는 이와 같은 언쟁, 심지어 작은 말다툼조차 해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 서로의 성격 차이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왠만한 큰 일이 아니면 넘겨 잊어버리기 위해 노력하고 상대방의 입장이나 생각까지 예상하고 거기에 맞춰 배려하는 경우가 많다. 남자친구는 기본적으로 상대나 상황에 대한 불만이나 평가가 없는 편이고 바로바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끔 발생하는 약간의 문제에 있어서 나는 엄청 오랜 시간이 걸려 생각을 정리하고 표현하기 위한 마음을 먹기가 힘든 반면 그는 서로 이야기를 해야하고 대화를 거부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 사인을 더 크게 받는 것 같다. 이번에 솔직한 이야기를 끝마치고 남자친구가 "이게 우리 첫 argument다, 그치? 근데 좋은거라고 생각해."라고 속삭였는데, 서로 이야기를 하고 들어주고자 하는 마음과 태도는 역시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같다. 나 또한 앞으로는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나에게는 엄청 큰 과제이자 극복해야 할 문제이기도 한데, 언제나 대화하는 순간에 남자친구가 내 말에 귀기울여 주고 이해해줘서 고마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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