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19
17일에 쓰던 일기를 이제서야 이어서 쓴다. 목요일에 일을 다녀온 후로 짧게나마 일기를 남기려고 했는데, 다음날도 출근을 해야해서 일찍 하루를 마무리했더니 어느덧 토요일이 되었다. 금요일 일정이 바쁘게 지나가기도 했고 나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하는 일까지 겹치는 바람에 차분한 마음으로 일기를 남길 여유가 없었다. 이제는 토요일 저녁이고, 늦은 낮잠도 자며 약간의 스트레스를 날렸으니 쓰던 일기에 새로운 내용을 덧붙여 마무리할까 한다.
수요일 밤부터 런던에는 비가 내린다. 내가 영국의 여름을 기분 좋게만 생각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비 왔던 기억이 별로 없는데 한국의 장맛비 마냥 열흘 가량의 일기예보에는 비구름 모양이 꽉 찼다. 25도까지 웃돌던 한여름의 날씨는 사라진건지 기온조차 20도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래도 이미 6월 말이 되어가는 날짜에 비가 와서 기온이 떨어져도 '춥다'는 느낌은 없지만, 쌀쌀하지만 습한 느낌의 날씨가 옷을 겹쳐 입기에도 시원하게 입기에도 애매하게 만든다. 다행히 오늘 출퇴근을 하는 타이밍에는 비가 옅어서 큰 불편함이 없었다. 단지 스튜디오 실내가 꿉꿉하면서 순간적으로 몸에 열이 확 올랐다 다시 식기를 반복했던 것 같다. 이럴 때 감기나 몸살을 더욱 조심해야 한다. 10년 차 자취생은 혼자 살아남는 법을 이렇게 본능적으로 안다.
오늘 업무는 지난번 trial에 만들었던 shorts 패턴을 수정하고 두번째 toile을 만드는 것이었다. 패턴 수정은 큰 시간이 걸리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새로 추가 된 포켓 디테일에 포켓 주머니 패턴을 새로 만들어야 해서 시간이 조금 걸렸다. 게다가 보통은 '기존 디자인에서 이것, 이것, 저것 수정해 주세요.'라는 식으로 디자이너와 수정할 사항들을 다 정학고 시작하는데 아직 우리들만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이 부족해서 그런 것인지 중간 중간에 계속 수정할 사항들이 추가되어 (심지어 피팅도 수정 중간에 봄) 수정 과정이 더 돌아가는 느낌이었달까. 결국 모든 패턴 수정을 하는데 하루 전부를 거의 다 쓴 것 같다. 이후 toile을 만들기 위해 재단을 한 것까지가 목요일의 업무였다. 그러다보니 처음에는 '이번주에는 목요일에 올 수 있어요?'로 정해졌던 스케줄이 '그럼 내일도 와서 일할 수 있어요?'가 되었고, 금요일에 저녁 일정이 있었던 나로서는 그럼 이번에는 한시간만 일찍 퇴근해도 되냐 했다. 디자이너는 흔쾌히 가능하다고 했지만, '그럼 기본적으로 일주일에 목, 금요일에 와서 일하는 걸로 생각하면 좋겠어요.'라고 언급하는 것을 보니 계속 이런 식으로 당일 조정은 쉽지 않다는 것을 느꼈나 보다. 나로서는 고정적인 스케줄이 생기는게 차라리 더 나아서 좋지.
그리고 금요일은 오전에 잠깐 직원들을 기다렸다. 보통 내가 도착하는 시간 전에 한 명이라도 스튜디오에 도착해서 문을 열어주는데 오늘은 심지어 늦을 것 같다는 메세지도 미리 받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같이 일하는 패턴사 분(나를 소개해주신 분)이 오늘도 오는 날이어서 같이 기다리다보니 조금은 기다려야 하는 시간에 건물 다른 곳의 실내 카페에 쉴 수 있었다. 커피도 얻어마시고, 헤헤. 일할 때는 보통 작업 테이블도 떨어져 있고 서로 일만 하느라 바쁘다보니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는데, 수다도 떨 수 있어서 좋았다.
사실 내가 미리 잡아 놓은 금요일 일정은 'Van Gogh Alive' 전시 때문이었다. 보통 퇴근 시간이랑 너무 가까워 시간이 아슬아슬할 것 같아서 1시간 일찍 끝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반바지 하나를 만드는데 거의 딱 맞게 완성할 수 있었다. 워낙 깔끔한 재봉을 기대하는 것 같아서 꼼꼼하게 한 부분도 있지만, 새로 추가된 디테일에 조금 재봉이 어려운 부분들이 있어서 시간에 여유를 가지고 만들었다. 디자이너들이 피팅을 하며 옷태를 보는 동안 나는 마무리 정리를 했고, 이후 수정 디테일도 전달되었다. 다음주 목요일에 와서 계속하기로 하고 난 후다닥 퇴근을 했는데 나중에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와서 계속 할 수 있어요?'라는 문자가 온 걸 보니 급한 일정이었나 싶기도 하고. 어차피 못한 1시간 더 한다고 해서 큰 차이가 생길 작업은 아니긴 했지만. 결국엔 화요일에 일을 가기로 하고 이번주 업무를 모두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도착한 'Van Gogh Alive' 전시. 더 자세한 내용은 이후 포스팅을 할거지만, 짧고 솔직한 평은 기대보다는 조금 별로였다는 것. 내가 워낙에 좋은 퀄리티의 제대로 된 비슷한 전시들(ex. Atelier des Lumières) 을 이전에 봤어서 그런지, 그와 비슷한 전시를 기대했던 나로서는 조금 별로였다. 하지만 아무런 다른 경험도 없었던 남자친구도 그저 그랬다고 하니 전시 자체가 엄청난 임팩트를 주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한다. 금요일에는 비도 엄청 내리고 날씨도 목요일보다는 훨씬 추워져서 (심지어 겨울 옷을 입은 사람들을 꽤 봤다) 이동하는 것이 고생이었다. 집에 돌아와 와인을 마시며 TV를 보고 수다를 떨다가 새벽 3시가 되어야 잠이 들었다.
느지막히 일어난 토요일, 오늘은 큰 계획은 없었다. 내일이 남자친구 생일이긴 한데, 이 녀석이 백신 1차 접종 예약을 내일 오전으로 해놓는 바람에 갑자기 생각이 벙쪄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에 언급했던 '나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하는 일'도 연관이 있었는데, 사실 남자친구 생일 선물 중 하나가 배송이 안되고 막혀버렸다. 사실 문제의 시작은 내가 배송 주소를 잘못 적은 것부터 시작되었는데, 이전 주문 기록이 남아있던 사이트라 이전 주소가 자동으로 적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난 그것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비슷한 부분만 보고 넘겨버린 것이지. 목요일부터 해당 브랜드 고객센터에 전화해서 주소 변경을 할 수 없냐, 주문을 취소하고 새로 주문할 수 없냐, 모든 방법을 문의했지만 이미 시스템 상 물류 쪽으로 주문이 넘어가버린 상태여서 주소 변경은 어렵고 자기가 최대한 배송 단계에서 주소 변경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나에게 이후에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성격이 급한 코리안에게 브리티쉬/유러피안의 느긋한 일처리는 그냥 손톱 뜯으며 닥닥닥닥거리고 있는 걱정+초조함을 주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금요일부터 계속해서 연락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메일을 받을 수 없었고, 결국엔 전시를 다 보고 나온 저녁에 브랜드 자동 연락 메일로 이미 나의 물건 배송이 시작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던 것이다. 그나마 Tracking number가 있어서 이것저것 알아보며 배송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상하게 금요일 저녁 8시 쯤에 물건이 'Parcel held-missing documents(Invoice or customs paperwork)' 상태로 프랑스에 딱 걸려있는 것이 아닌가. 아, 분명 이 사람들은 주말동안 일할 것 같지 않은데, 심지어 프랑스에서 멈춰있으니 문의를 넣을려고 해도 언어의 장벽까지 나를 가로막는 상황인 것이다. 나는 그저 배송지를 바꿀 수 있기를 바랬을 뿐인데 문서가 분실되었다고 하니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또 다른 걱정이 생겨버렸다. 그 이후로 주기적으로 확인하고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알아보려 했지만, 결국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최종 결론이었다. 월요일까지 연락 혹은 배송 상태의 변화를 기다려보거나 아니면 해당 브랜드로 전화해서 상황를 물어보는 것이 최선일 것 같아 지금은 최대한 마음을 놓으려고 하고 있다.
그 외에는 오후에 한인 마트에 가서 장을 봤고, A.P.C.에서 급 쇼핑도 했다. 서프라이즈 아닌 서프라이즈 생일 풍선도 사고 선물 포장지도 사서 몰래 포장을 마쳤다. 하지만 조금 분위기가 안 좋은 일이 있었는데, 남자친구가 저녁(간단한 pre-cooked mussels)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밀린 빨래를 하면서, 나는 나름대로 집안일 방법에 대해 알려주려고 이야기를 꺼냈는데 남자친구의 반응이 약간 뚱해버렸던 거다. 사실 집안일 문제는 내가 지금 제일 심각하게 가지고 있는 우리 관계에서의 유일한 문제 중 하나인데 이것을 어떻게 논의하면 좋을지 어려워서 나 혼자 기회를 엿보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꺼내는 게 좋나? 이 타이밍에 이렇게 말하면 기분이 덜 나쁘려나?'하며 각을 재다 재다 어렵게 꺼내는 일인데 남자친구가 그때마다 '나도 이미 알아.' 혹은 '난 싫어.'라는 식으로 대답하면(물론 남자친구는 나의 생각과 상황을 모르니 그저 자기 나름대로 반응하는 것, 이것도 나는 이해를 하면서도) 나 혼자 기분이 상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나의 주변 공기가 우울+짜증+심각으로 변학게 되고 불행 중 다행으로 그 공기를 읽을 수 있는 남자친구는 영문을 모르는 채 계속 내 눈치를 살피게 되는 것이다. 이미 나는 거절 아닌 거절을 당한 입장으로서 더 이상의 이야기를 꺼내기 싫어지고 그저 별 일 아니다, 라며 넘긱기 일쑤가 되버린다. 그렇게 오늘도 저녁을 먹으면서 TV에는 분명 웃긴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놓고선 누구도 이야기 하나 하지 않다가 갑자기 남자친구가 낮잠을 자야겠다며 자리를 뜨겠다 했다. 그래서 난 알겠다고 그저 휴대폰만 봤는데, 내 눈치를 계속 살피던 남자친구가 대뜸 낮잠은 안자고 화장실 청소를 하려는게 아닌가. 분명 어제는 또 하기 싫다고 미루더니 내 눈치에 밀려 하는 것 같은 느낌이어서 내가 그냥 낮잠이나 자라고 했는데도 내가 잠깐 잠든 사이에 부시럭거리다 결국엔 청소를 조금 했더라. 나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마음과 행동으로 봐서는 분명 좋은 타이밍에 좋은 방법으로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 잘 맞출 수 있는 부분 같은데 시작이 너무 어렵다. 그래도 서로 낮잠 자고 일어나서 허그하며 화해 아닌 화해를 했다. 물론 난 속으로 다음 타이밍을 노려야지, 이건 꼭 한번은 이야기 해야 하는 부분이야, 라고 생각했지만.
내일은 남자친구 생일이다. 아침부터 백신 접종으로 매우 바쁘고 정신 없을 것 같지만 또 알찬 하루를 보내야지. 아직 1시간 21분 남았지만, 생일 축하해, 내 남자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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