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11
방금 유로 2020 결승전인 잉글랜드와 이탈리아의 경기를 다 봤다. 혀 끝에 맴도는 쓴 맛을 삼키며 그 동안 밀린 일기를 써볼까 한다.
남자친구와 나는 밥 먹을 때마다 무엇을 볼 것인지가 가장 큰 난제인데, 재미있는 시리즈를 잘 고르면 한 동안 아무런 고민 없이 계속해서 보지만 가끔은 결정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컨텐츠 목록만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최근 MasterChef: The Professionals를 보게 되었다. 요리는 늘 계량 아닌 감각으로 하지만, 건강하고 맛있게 먹는 것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그저 남이 요리하는 모습만 봐도 흥미로운데, 기존 Master Chef 프로그램과는 달리 이 시리즈는 실제로 셰프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참가하는 것이라 좀 더 재미있지 않을까 싶었다. 오리지널 버전과는 테스트 과정도 다르고, 최종 결승 후보들을 뽑는 시스템들도 달라서 새로웠다. 그렇게 간간히 한 회차씩 보고 있는데, 무의식 중에 셰프들이 요리하는 모습들에 영향을 받은 것일까, 갑자기 나와 남자친구 모두 요리 욕구가 솟아 올랐다. 평소에 내가 다양한 레시피의 요리를 하는 편이긴 한데, 남자친구는 전혀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요리 레시피를 찾아 시도하곤 했고, 나 또한 기존에 자주 하던 한식 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메뉴들을 만들곤 했다.
남자친구는 Middle Eastern food나 Sri Lankan/Indian food를 좋아하고 즐겨 요리하는데, 나는 전혀 생각도 안하는 레시피들이라 신선하다. Roast chicken을 하는데 요거트 소스로 시즈닝을 한다거나 다양한 향신료들을 이용한 요리들을 만드는데, (남자친구가 걱정하는 것과는 달리) 늘 맛있다. 첫번째 사진의 구운 야채들은 슈퍼마켓에서 미리 준비된 야채 세트를 사온 것인데, 내가 좋아하지 않는 피망이 많아서 엄청 덜어냈지만(..) 치킨이나 다른 야채들, 그리고 hummus와 석류의 조합은 정말 좋았다. 그리고 두번째 사진의 치킨과 커리 소스는 이번에 내가 생일 선물로 준 Sri Lankan 요리책 중 한 레시피를 따라 만든 것인데, 엄청 맛있었다. 그의 말로는 요리하는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리지만 레시피 자체는 간단하다는데, 치킨이 매우 부드럽고 시즈닝과 소스도 매력적이라 마음에 들었다. 나는 세번째 사진의 새우 오일 파스타와 오븐 야채 구이를 했었는데, 이건 새로운 레시피는 아니지만 남자친구가 좋아하는 메뉴기도 하다. 대신 지난번 스테이크를 먹을 때도 시도했던 오븐 야채 구이가 매우 마음에 들어서 종종 앞으로 건강식으로 해먹지 않을까 한다. 그 외에도 나는 점심으로 버섯 치킨 샌드위치를 만들기도 했는데 찍어둔 사진이 없지만 남자친구가 아주 맛있다고 했다. 점심은 최대한 빠르고 간편하게 먹으려고 하는데, 계속 토스트 종류를 먹곤 해서 금방 지겨워지곤 했는데, 새로운 메뉴를 시도해보니 좋았다. 한동안은 이렇게 열심히 새로운 메뉴들을 요리해보며 식단을 채울 듯 하다. 아직 시도해 보고 싶은 레시피들이 많다구!
그 외에 요즘 인스타그램에서 핫한 Lemon & Dill Butter 도 만들어 보았다. 영국은 레몬이나 허브 구하기는 엄청 쉽고, 게다가 가격도 비싸지 않아서 금방 재료들을 사다가 30분만에 만들 수 있었다. 냉동실에 꽝꽝 얼려 두었는데 다음에 간단한 토스트나 스테이크 요리와 같이 버터를 쓸 일이 있으면 사용해 보고 싶다. 향기만으로도 향긋하고 상큼한 향이 더해져서 엄청 기대된다.
남자친구가 퇴근하고 나면 잠깐 저녁 산책이라도 가는 것이 하루 중 즐거운 일상. 나는 엉덩이가 무거워서 이렇게 데려나가 주는 사람이 없으면 하루 종일 나갈 생각을 잘 안하는데, 이렇게 잠깐이라도 같이 나가서 걸으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대신 날씨가 아무리 안 좋은 날에는 필수적인 이유가 없으면 날 설득할 수 없음.
목요일이었나, 드디어 지난 달 월급(?)을 받았다. 프리랜서라 월급이라 표현하기 애매하긴 하지만, 어쨋든 6월 중순에 시작했는데 그 달이 지났으니 그 동안 일했던 시간을 계산해서 invoice를 제출했다. (6월은 딱 8일 일했더라.) 지난번 일하던 스튜디오는 돈 주는 날짜를 계속 미뤄대서 ("프리랜서의 삶은 원래 그래."라는 식의 핑계를 듣긴 했지만) 엄청 스트레스였는데, 이번에는 몇 일 늦어진 것으로 미안하다며 처리 중에 있다고 계속 업데이트를 해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었다. 그리고 사실 나의 예상보다는 빨리 받음. 하, 과거의 경험이 얼마나 나의 현재 마음 가짐을 달라지게 하는지. 최저 시급도 못 받아 가면서 그래도 경험이랍시고 일했는데, 지금 와서 제대로 대우 받아가며 일하니 그 시간들이 얼마나 비정상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세상엔 정말 약은 사람들이 많다. 아무튼 Milk money(일종의 까까 사먹을 돈) 정도의 아주 소박한 페이였지만, 얼마나 뿌듯했던지. 그리고 거의 여섯달을 고민했던 Dior 카드 지갑을 샀다. 3~4년간 쓰던 지갑이 있었는데, 요즘엔 현금을 잘 사용하지 않으니 카드만 넣을 수 있는 지갑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아 괜찮은 카드 지갑을 하나 구입하고 싶었다. 아코디언 형태의 디자인은 여러 섹션으로 카드들을 나눠 넣을 수 있어서 편리해 보였고, Dior에도 그런 형태의 카드 지갑이 있길래 마음에 쏙 들었다. 하지만 역시나 "과연 내가 이것이 정말 필요한가."와 같은 수만번의 고민과 생각으로 여섯달을 보냈다. 한국에 돌아갔을 때는 엄마가 그냥 사주겠다 하셨지만, 한국은 매장 자체를 못 가겠던데요.. 카드 지갑 때문에 오픈런을 하고 싶지도 않고. 영국 나오는 길에는 또 공항 면세점에 Dior 매장이 없어서 기회를 놓치고, 런던에 와서야 백화점에서 한번 봤지만 또 한번 넘기며 고민했다. 하지만 계속 생각나길래 이번에 결국 샀다는 것. 기나긴 여정이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고민하다가 사면 너무 좋고 더 마음에 든다.
그렇게 오늘 Dior 카드 지갑을 사겠다고 Central London으로 향했는데 런던은 이미 유로 2020 결승전으로 분위기가 무르 익어 있었다. 심지어 내가 나간 시간은 거의 경기 7시간 전이었는데. 잉글랜드 국기를 두르고 응원을 열기를 내뿜고 있는 사람들이 여럿이었고, 지하철이나 거리나 응원가를 부르며 서로 호응하는 많은 그룹들도 있었다(그 놈의 중독적인 Harry Maguire 노래, 다들 왜 그렇게 그를 불러대는지.). 그리고 길거리의 펍과 식당은 이미 복작복작. 얼른 구매할 것 구매하고, 'Bunsik 분식'이라는 새로운 한국 레스토랑에서 한국식 핫도그도 사먹고 후다닥 집으로 돌아왔다. (진심 런던에서 한국식 핫도그를 먹을 수 있다니 너무 좋았다. 물론 Central London까지 가야하지만, 그래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어딘가. 게다가 스타일도 맛도 한국이랑 다를 바 없어서 너무 좋았다. 역시 맛있는거 먹으면 행복해.)
▪︎ Bunsik
Address : 62 Charing Cross Road, London WC2H 0BB
Open : Sunday - Thursday 11:30 ~ 20:00 / Friday - Saturday 11:30 ~ 21:00
Website : https://www.instagram.com/bunsik_london/?hl=en
그리고 저녁에는 대망의 유로 2020 결승전이 있었다. 저녁 8시 경기였기에 그 전까지 집안일도 조금 하고, 치킨도 미리 배달 주문하고, 남은 술 탈탈 털어 G&T도 준비했다. 남자친구는 누구와 어디서 경기를 볼지 엄청 고민하다가 결국엔 부모님 댁으로 갔다. 내심 나와 같이 가길 바랬던 것 같지만 나는 마음 편히 소리 지르고 주문 외우면서 보고 싶었기에 혼자 집에 남아 경기를 관람했다. 8시 경기가 시작하고, 2분만에 잉글랜드는 멋진 골을 만들어 냈다. 경기가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럽게 터진 골이라 어리둥절하면서도 반사적으로 환호를 질렀다. 잉글랜드는 남은 시간 동안 추가골을 만들어 낼 기회의 만들거나 최소한 점수를 지키기만 해도 좋은 유리한 입장을 만들어 놓고 경기 초반을 이끌었다. 하지만 전반전 후반부터였나, 무언가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잉글랜드 선수들의 움직임이 더뎌지는 것 같았고, 좀처럼 공을 가져도 이전 경기들에서 보여주던 매끄러운 패스 연결이나 흐르듯 유연하게 만들어 지던 득점 기회들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탈리아 선수들은 옐로 카드를 받을 정도의 과격하고 의도적인 태클들을 많이 만들어 냈는데, 교묘하게도 그 위치들이 늘 유리하지 않은 곳이여서 프리킥 기회를 얻어도 결정적인 기회가 될 수 없었다. 아쉽게도 더 이상의 추가 득점을 만들지는 못하고 후반전으로 경기가 이어졌는데, 잉글랜드는 좀처럼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축구를 잘 모르는 나로서는 단순하게 '공을 오래 가지고 있으면 기회가 만들어지고, 그럼 득점의 가능성도 높아진다.'라고 생각하는데, 후반전에는 잉글랜드가 공을 가질 수 있었던 기회조차 많지 않았다. 중간에 슬쩍 확인했던 점유율이 거의 75:25 정도로 차이가 났으니, 얼마나 이탈리아에게 끌려가는 시간이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결국엔 후반 20분 쯤 이탈이아에게 한 골을 내어주고 말았다. 너무너무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이후 후반전을 10분 정도 남겨둔 시간부터는 잉글랜드 선수들의 움직임이 다시 살아나는 듯 했다. 공 점유율도 높아지고 좀 더 골문을 열 듯한 기회들도 만들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선수들의 교묘한 태클에 많이 걸리곤 했는데, 그런 부분들로 쓴 맛을 감돌게 하는 경기가 되었던 것 같다. 이어진 연장전도 잉글랜드는 최선을 다해 경기를 이끌었지만, 결정적인 득점 기회로 이어지진 못했다. 결국 잉글랜드와 이탈리아 모두 남은 시간동안 득점을 하지 못했고, 유로 2020의 결승전은 승부차기로 승패를 결정짓게 되었다. 난 사실 축구에서 승부차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저 운의 결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인생에서도 운으로만 결정지어지는 순간들도 있겠지만, 스포츠에서 마저 결과가 운에 따라 달라진다니. 다섯개의 슈팅을 홀로 겪어야 하는 골키퍼들의 긴장과 부담도 안타깝고 단 하나의 슈팅 성공 여부 때문에 기쁨과 좌절감을 겪을 선수들이 안쓰럽기만 하다. 그런데 스포츠는 너무 냉정하지. 결국엔 모두가 합의한 규칙이기에 어떻게든 승자와 패자를 가리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잉글랜드와 이탈리아는 승부차기에 임했다. 결과는 3:2, 세 개의 슈팅을 놓친 잉글랜드는 아쉽게 패배했다.
정말 내가 나이가 들어가나 보다. 20대 중반부터 좀더 감성적으로 변한다고 느껴왔는데, 스포츠 경기를 보는 이런 순간에도 감정이 너무 넘쳐흘렀다. 이전에는 스포츠 경기를 봐도 그저 냉담하게 보았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 선수들이 느끼는 감정에 괜히 이입되고 그저 안쓰럽고 안타깝다. 물론 잉글랜드가 패배했기에 더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만, 이번 경기는 좀 더 씁쓸했던 것 같다. 사실 난 영국인도 아니고 그렇게 이탈리아한테 적대감을 느껴가며 이 경기를 볼 필요가 없었단 말이지? 그런데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준결승 경기부터 이탈리아가 조금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경기에서도 내가 느끼기엔 승기를 잡은 이탈리아가 후반전 마지막엔 눕고 쓰러져가며 시간을 끌어댔던 것 같은데, 스포츠만은 정정당당한 승부가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나의 마음으로는 그러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그것도 스포츠의 일부니, 똑똑하다고도 약았다고도 할 수 있는 전략 중에 하나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인정하고 싶지 않다. 오늘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도 이탈리아는 무려 5개의 옐로 카드를 받았다. 특히 Chiellini 선수가 Saka 선수의 옷 목덜미를 노골적으로 잡아 당기며 공격을 방해했을 때에는 솔직한 마음으로 이탈리아한테 없던 정도 다 떨어졌다. 그래서 Chiesa 선수가 다쳐서 절뚝댈 때는 '아프면 교체하고 나가라, 이 밉상아!'라는 생각마저 들었으니. 경기 후에는 되려 집에 돌아온 남자친구가 나를 위로해주는 상황이었다. 나 왜 이렇게 난리니? 인생에도 사회에도 치사하고 불합리한 온갖 권모술수가 남발하는데, 그런 모습을 스포츠에서 만은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해서 더 입 안에 쓴 맛이 도는 것 같다. 물론 오늘 승부의 결과는 이탈리아를 응원하던 사람들에게는 기쁨과 환호를 주었으니 의미있는 결과일테지. 하지만 나는 멋진 경기를 보여준, 그리고 그 어려운 상황에도 최선을 다했던 잉글랜드 선수들에게 큰 박수를 쳐주고 싶다. 특히 오늘 밤 쓰라린 마음으로 잠들지 못할 몇 명의 젊은 선수들, 그들에게 오늘의 경기가 상처가 아닌 추억이 되기를 바란다.
'▪︎ 일상 기록장 > 2021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국생활] Day+1770 전시 관람으로 꽉 찬 주말 & 쿠키샵 CRÈME (0) | 2021.07.19 |
---|---|
[영국생활] Day+1766 한가한 평일 (0) | 2021.07.15 |
[영국생활] Day+1759 유로 2020 잉글랜드 vs 덴마크 경기 (0) | 2021.07.08 |
[영국생활] Day+1756 주말 여행 (0) | 2021.07.05 |
[영국생활] Day+1752 Happy Birthday for me (0) | 2021.07.0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