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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 기록장/2021년

[영국생활] Day+1756 주말 여행

by kyeeunkim 2021. 7. 5.

2021.07.04

  생일이 지난 후, 하반기가 되었다는 감흥을 느낄 새도 없이 주말을 맞았다. 목요일엔 출근을 했었는데, 스튜디오 공사 때문에 일하는 종일 소음과 먼지로 힘들었다. 만들어야 할 toiles가 두 개나 있었지만 시간이 필요할 뿐 어렵진 않아서 작업은 괜찮았는데, 그저 바로 옆에서 공사를 하루 종일 해대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특히 소음에 예민한 나로서는 나의 옆, 위에서 난리 법석을 떨어대는 그 상황이 너무 불편했다. 스튜디오를 정식으로 factory zone과 design studio zone으로 나누고 개조한다고 몇 주간 하던 공사이긴 했는데, 이 날은 내가 재봉 기계를 써야 하는 작업인데, factory zone도 공사하는 것이어서 더 애매한 상황이긴 했다. 디자이너도 환경이 이래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그의 잘못이 아님을 아는 나도 짜증은 나지만 불평할 수도 없었다. 제발 공사가 곧 마무리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스트레스로 힘든 하루를 보내서인지 금요일은 너무 피곤했다. 재택근무를 하는 남자친구 때문에 비록 내가 출근을 하지 않는 상황이어도 늦어도 9시 쯤이 되면 일어나곤 하는데 이 때는 눈조차 뜰 수 없었다. 온 몸이 침대에 묶여있는 느낌으로 아침에 한동안 끙끙거리고 누워있다가 11시가 되어서야 겨우 일어났다. 이후 한국에 있는 친구 예진이와 통화하기로 일정을 잡아놨어서 씻지도 않고 잠옷 차림으로 거의 3시간을 통화한 것 같다. 그 동안 밀린 이야기들이 있기도 했지만 베프인 예진이와 통화하면 늘 두 세시간은 기본이다. 내가 통화하는 동안 애매하게 점심을 놓친 남자친구를 위해 저녁은 파전과 김치전을 해서 배부르게 먹었다.

 

  그리고 7월의 첫 주말은 여행으로 꽉 채웠다. 얼마 전, 과거의 사진들을 정리할 겸 다시 들춰보는데, 최근에 런던 근교를 여행한지 엄청 오래된 것을 깨달았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한동안 여행 자체가 제한된 상황이기도 했지만 어떻게 보면 남자친구를 만나면서 달라졌던 부분이기도 했다. 학생 때는 최대한 영국의 많은 것을 경험해보겠다고 기회가 되는대로 영국 내를 많이 여행하려고 했다. 런던에서 먼 곳이나 교통이 불편해 뚜벅이 여행으로 힘든 곳은 어렵더라도 런던 근교나 작은 도시들은 충분히 당일치기로도 가능해서 혼자 훌쩍 떠나기도 했고 친구와 다녀오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여행의 레벨이 쌓여 유럽 정도는 혼자 여행하기도 했는데, 남자친구를 만난 이후로 갑자기 그 경험치가 떨어졌다. 워낙 잘 맞는 사람을 만나게 되니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영국 현지인을 만나게 되니 미처 혼자 다니지 못했던 먼 곳을 긴 기간동안 가는 여행을 주로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다시 되새겨본 과거의 시간과 경험들이 그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나의 영국 생활이 너무 남자친구에게 의존적인가 싶어 남자친구가 원하지 않으면 혼자라도 다시 여행을 다녀보자 생각했다. 그런데 나의 남자친구는 나와 함께하는 무언가를 싫어하거나 원하지 않을리가 없는 사람이죠. 또한 남자친구의 강점 중 하나라면 리서치 능력과 실행력이 엄청나다는 것인데, 내가 미리 찾아놓은 런던 근교 도시의 사진을 찾아보고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하자 마자 날짜와 기차표를 예약해 버렸다. 심지어 난 당일치기로 생각했는데, 그냥 하룻밤 자고 오자며 숙소까지 정해버림. 그렇게 이번 주말에 Rye와 Hastings로 1박 여행을 다녀오게 된 것이다.

토요일 기차 타고 Rye 가는 길

  자세한 여행 기록은 카테고리를 따로 만들어 기록할 계획이지만, 주말 전체가 여행으로 가득찬 시간이었던 만큼 비록 내용이 중복 되더라도 일기에도 살짝 남겨볼까 한다. 마스크를 써야한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이지만, 오랜만에 기차를 타고 런던을 떠나는 여행은 너무 설레었다. 남자친구와 이렇게 여행을 했던 것이 작년 여름 휴가로 New Forest를 갔던 것이 마지막인데, 벌써 1년 전이라니 믿기지 않는다. 내가 영국 생활 1년 차에 오후 4시에 해 지는 겨울에도 Bath를 혼자 당일치기 하던 사람이었는데, 거의 1년 동안 여행을 하지 않았다니. 그동안 내가 코로나를 핑계로 외면했던 일들이 많았구나, 싶었다.

Rye 거리, 날씨가 흐리지만 비는 그쳤다

  이번 주말 여행에서 가장 걱정했던 부분은 날씨였다. 최근에 여름 날씨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계속해서 비가 왔고, 흐리고 쌀쌀한 날이 대부분이었고 자주 확인한 이번 주말 날씨 예보도 비와 구름 투성이었기에 조금 힘든 여행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Rye에 도착한 이후로 새벽~오전에 내렸던 비가 그쳤고 비록 하늘은 흐리고 조금 쌀쌀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나은 날씨였다. 게다가 이후의 사진들에서 볼 수 있겠지만 점점 하늘이 개어 맑고 예쁜 하늘이 보이기도 하고 더위를 잘 타는 남자친구는 덥다며 겉옷을 벗고 입기를 반복했다.

Rye의 유명한 돌길, Mermaid Street과 St Mary's Church Tower에서 바라본 전경

  Rye는 두 세시간 정도면 유명한 곳은 대부분 다 볼 수 있는 작은 도시였다. 많은 역사를 품고 있는 도시라고 하는데, 건물이나 도로에서 옛스러운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오랜 시간을 담은 아기자기한 도시는 작은 골목길, 낡은 성벽, 옛날 건물들이 모두 예뻐서 어디서나 사진을 찍어도 좋았다. 그렇게 여러 곳을 구경한 후 오후 3시 쯤엔 예약해 놓은 숙소에도 체크인을 했는데, 이 쯤부터 남자친구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바로 7월 3일 저녁 8시에 Euro 2021, 잉글랜드와 우크라이나의 축구 경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엄청난 축구 팬인 남자친구(누가 영국인 아니랄까봐..)는 기회가 되면 좋아하는 축구 경기를 챙겨보는데 토요일 경기는 잉글랜드 경기인데다 몇 일 전 55년만에 독일을 꺾고 올라온 8강전이어서 꼭 펍에서 사람들의 열기를 느끼며 경기를 보고 싶어했다. 하지만 이전부터 검색한 바로는 Rye에 대부분의 펍이 전체적으로 예약이 꽉 찬 상황이었고(도대체 작은 도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머물렀던 것인지 상상이 안된다) 더군다나 축구 경기를 볼 수 있는 펍이 많지 않았다. 그러다 비록 예약을 받지는 않지만 Sport pub이라고 나오는 한 곳을 딱 골라놓고 조금 일찍 가서 자리를 맡기로 했는데, 도시 구경을 거의 끝낸대다 이미 낮부터 잉글랜드 유니폼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꽤 본 터라 자칫하면 자리를 놓칠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 The Crown Inn
Address : 1 Ferry Road, Rye TN31 7DJ
Open : Monday - Tursday 12:00 ~ 00:00 / Friday 12:00 ~ 02:00
              Saturday 10:00 ~ 02:00 / Sunday 10:00 ~ 00:00

Website : https://www.facebook.com/RyeCrown/

화이팅, 잉글랜드! 행복한 저녁을 만들어줘서 고마워

  평소 욕심도 많지 않은 남자친구가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축구라는 것을 아는 나로서는 그가 원하는대로 따라주는 것이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나 또한 큰 스포츠 경기들을 보는 것은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펍으로 가서 자리를 잡기로 했다. 그 때가 거의 오후 5시였나. 잉글랜드 경기는 저녁 8시였는데, 하하. 도착한 펍은 이미 여러 스크린과 TV에 중계 화면을 켜두었고, 곳곳에 영국 국기와 색깔로 장식을 해놓아서 남자친구가 원하는 분위기에서 경기를 관람하기에 딱인 곳이었다. 이미 몇몇 사람들도 도착해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우리도 일찍 도착했기에 좋은 자리를 맡을 수 있었다. 오후 5시에 했던 덴마크와 체코의 경기를 보며 미리 분위기를 띄우고 이후 저녁 8시에 시작한 잉글랜드와 우크라이나 경기를 떨리는 마음으로 관람했다. 그리고 현지에서 느끼는 영국 사람들의 축구 열기는 정말 대단했다. 특히 우리와 같은 공간에 있었던 사람들 중 (술에 점점 취해가며) 응원을 열성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한편으로는 경기 관람보다 다른 것에 더 즐거움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덕분에 영국인들의 열광적인 축구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제발 내 남자친구의 저녁을 행복하게 만들어줘!'라는 마음으로 잉글랜드를 열심히 응원했고, 잉글랜드 선수들도 그에 보답하듯 멋진 경기를 보여줬다. 4:0의 승리를 거둔 덕분에 나의 남자친구의 밤은 행복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오늘은 숙박비에 포함된 조식으로 아침을 든든하게 시작했고, 잊지 못할 Knoops의 밀크쉐이크도 한번 더 즐기며 Hastings로 향했다. Rye와 Hastings는 기차로 20분 정도 걸리는 멀지 않은 거리였고,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느낌이 가득한 Rye에 비해 Hastings는 좀 더 규모가 크고 바다에 인접한 도시였다. 정말 운이 좋게도 새벽에 내렸던 비는 그쳤고, 우리가 도착한 이후로는 하늘이 엄청 맑아져서 점차 예쁜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바다를 좋아하는 나는 바로 첫 순서로 Hastings의 Pier로 향했고, 자갈 해변을 걸으며 시간을 보냈다.

Hastings의 바다

  이후 Old town과 함께 Hastings castle까지 여러 장소를 여행했다. 특히 성곽까지 올라가는 길은 쉽지 않았지만 정말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어서 좋았고, 역사를 좋아하는 남자친구는 곳곳에 보이는 설명들을 놓치지 않고 읽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는 자세한 영국의 역사를 알지 못해 가끔 그가 설명해주는 것이 어려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여행을 통해 차근차근 배워가는 것도 의미있는 시간이다. 중간에 펍에 들러 맥주 한 잔을 할 때 비가 오면서 바람이 강해졌지만, 그마저도 우리 여행에 쉴 여유를 주는 시간이 되어서 좋았다. 여행 중 곳곳에서 보았던 전망은 정말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고, 오늘 하루 경험했던 선명한 색감과 마을의 풍경들은 내가 좋아하는 모습 그 자체였다. 남자친구는 그 어느 해안 도시보다 Hastings가 가장 좋다며 다음에 꼭 다시 오고 싶다고 했다.

Hastings Castle
내가 가장 좋아했던 전망

  그리고 여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우리는 기차를 타고 런던으로 돌아왔다. 20000보 가까이 걸은 오늘 하루는 돌아오는 기차에서 끊임없이 낮잠을 자게 하는 피로감을 주었지만 이상하게도 엄청 몸이 힘들거나 지치는 느낌은 없다. 뿌듯하고 즐거운 느낌이랄까. 너무 즐거운 주말이었고 이런 여행을 자주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집에 돌아와 일기를 쓰는데 갑작스러운 정전을 겪었다. 세상이 까맣게 변한 시간이었달까. 대략 5분 정도의 짧은 정전이었지만 영국에서 처음 겪은 것이었기에 -남자친구는 일평생 처음이랬음- 살짝 겁이 나기도 했다. 진짜 별 일을 다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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