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26
정말 힘든 15시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상기후를 걱정하고 이미 발생하고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그것을 극적으로 느낀 적은 별로 없었다. 여름에 이상하게 많이 더웠다는 것 정도? 온난화야 익히 알고 있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것에 대해 무덤덤했던 것은 솔직히 말해 영국 여름이 한국보다는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고온 다습한데다 장마와 태풍이 몰아치는 한국에 비해 섭씨 30도만 올라가도 최악의 더위니 뭐니 하는 영국의 여름은 그 더운 몇 일(덥다고 난리치는 날씨도 1~2주 정도였다.)만 버티면 쉽게 잊혀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에어컨이 없는 영국이라서 더 덥다고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싶었고, 이렇게 날씨가 더워지는 상황에도 에어컨을 기대하지 않는 영국 사람들의 성질이 대단하다고만 느껴질 뿐 최악의 여름은 아니네, 싶었다.
하지만 올해, 정말 날씨가 이상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여름에는 비오는 경우가 정말 손에 꼽을 정도인 영국에 정말 주구장창 비 내리는 날이 많아지고, 더운 날도 몇 일 있었지만, '이게 여름이야?' 싶을 정도로 쌀쌀한 날씨가 많았다. 그래도 '진짜 올해 날씨 이상하다.'라고만 넘겼던 것은 그 날씨가 당장의 생활에 피해를 주지 않았고 게다가 새로이 살고 있는 집은 나름의 에어컨 장비가 있는 신식 플랏에다 방향 탓인지 여름 내내 덥다고 느낀 적이 별로 없었다(심지어 나는 에어컨의 필요성도 못 느꼈는데, 더위를 많이 타는 남자친구 덕분에 몇 번 틀어봤다.). 그런데 어제 저녁, 기어코 이 날씨 때문에 우리의 생활이 극적으로 불편해지는 일을 겪었다.
오후 3시 쯤이었나, 예상했던 것보다는 조금 늦은 시간 런던에는 비가 내렸다. 매일 확인했던 기상 예보에는 토요일부터 천둥 번개와 함께 비가 내린다고 했었지만, 토요일을 지나 일요일 아침까지도 비소식이 없었기에 큰 구름이 런던을 비켜갔나 했다. 하지만 늦은 오후부터 비는 엄청나게 쏟아졌고, 영국 생활 5년차에 겪는 두번째 여름 폭우였다. 첫번째 여름 폭우는 몇 주 전이었는데, 그 때도 런던에 몇몇 역과 집들이 잠기는 등 난리가 나긴 했지만 우리 플랏은 그런 일을 겪지 않았기에 이번에도 별 탈 없이 지나갈 것이라 생각했다. 엄청난 천둥 번개에 비오는 영상을 남기고, 날씨를 핑계로 조금 게으른 일요일을 보내고 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는 저녁에 갑작스럽게 발생했다. 정전이 된 것이다. 파팟- 하는 소리와 함께 플랏의 전기가 나가는 소리가 들리며 전체 전기가 나갔지만, 게임을 하고 있던 남자친구가 컴퓨터 전원이 꺼져 "으악!"이라는 단발성 괴성을 질렀을 뿐 사실 우리는 별 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얼마 전에 런던 생활 최초로(심지어 남자친구에게도) 정전을 겪었는데, 30분이 지날 즈음 전기가 모두 돌아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나 시련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오는 법이지. 30분 정도가 지나자 우리는 당장 저녁을 걱정해야 했다. 인덕션이 설치 된 우리 플랏에서는 정전 시에는 요리가 불가능했고, 전자레인지와 오븐 사용도 마찬가지여서 결국에 계획에 없었던 배달 음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이 때까지도 괜찮았다. 수도도 단수 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물 마시는 것에도 게으른 일요일을 보내던 상황이었는데(그래서 Brita Jug에 물도 안 채워놨었음) 저녁 때가 되자 참았던 갈증이 몰려왔고, 수도가 끊겨 마음껏 물을 못 마시는 상황이 되자 마음이 더 초조해졌다. 밤까지는 정상 복구가 되겠거니, 하면서 남은 물로 어찌저찌 시간을 보내는데 점차 시간이 갈 수록 생활의 불편함과 불안함이 커져갔다. 저녁은 어떻게 먹었어도, 해가 지는 저녁부터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TV를 볼 수도 없고, 휴대폰이나 노트북을 마음껏 할 수도 없었다. '곧 전기가 들어오겠지...'라는 마음으로 남아있는 휴대폰 배터리를 쓰다가 노트북을 이용해서 충전을 해야 하는 상황을 겪으니 이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급하게 찾아본 UK Power Networks 사이트를 통해서 상황 업데이트를 살펴 봤지만, 전력이 공급될 예상 시간은 뜨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 깜깜해진 어둠 속에서 침대에 누워 잠시 잠을 잤는데, 그 때 기분은 '일어나면 전기가 다 들어와 있었으면 좋겠다.'였다. 근데 잠깐 후에 일어났을 때도 집은 여전히 어두웠고,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느껴 남자친구에게 마실 물이라도 사러 가자고 길을 나섰다.
그렇게 물을 사러 나간 길은 엄청 어두웠다. 구역별로 전기가 나뉘어저 공급/관리되는 것인지 조금 길을 나와 슈퍼로 향하는 길은 밝았는데, 여기도 또 한 사건을 겪었다. 지하철 역 앞 거리에서 어느 취객 2명이 나를 보고는 짧은 일본어로 인사를 했던 것. 사실 한동안 인종차별이라는 걸 겪은 적이 없었고(매우 다행스럽게도,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개인적으로 아주 사소한 것은 인지도 못하고 지나치는 편이라서 처음에 그들이 일본어로 이야기를 했을 때는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쳤었다. 게다가 어두운 저녁에 마스크까지 착용하고 있었기에 내가 아시아인임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지 않을거라 생각했기에 그저 우연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옆에 있던 남자친구가 "기분 나빠하지 말고 무시하고 지나가자."라고 하기에 쳐다보지도 않은 나와 달리 남자친구는 그 인사말이 나를 향한 것임을 알아챘나 보다. 나 또한 인종차별을 하는 수준 이하의 사람들과는 대화가 불가능하고 무시가 최선의 방법 중 하나라는 것을 알기에 급하게 슈퍼로 향했는데, 생수 2병을 집어 돌아서는 순간 그 사람들이 같은 가게로 들어왔다. 계산대 앞에 선 순간 그 사람들도 내 옆에 같이 섰고, 계속 이상한 일본말을 하면서 심지어는 그 둘 중 한명이 계산대 앞에 놓여진 초콜릿, 사탕과 같은 낱개로 판매하는 간식 중 하나를 들고 내 쪽으로 던졌던 것 같다. 나는 그 방향으로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정면을 응시했기에 정확한 상황은 모르지만, 무슨 사탕 봉지 소리가 툭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한 명이 물건을 집어서 던질 정도가 되자 다른 한 명이 낄낄대면서 그것만은 막아내는 것 같았는데(하지만 여전한 장난조), 나로서는 그저 무섭고 짜증나서 그 상황을 얼른 피하고 싶을 뿐이었다. 계산 후 슈퍼를 나서 집에 돌아올 때는 별 일이 없었고 따라오는 것 같지도 않았지만, 오랜만에 겪는 짜증나는 상황이 그렇지 않아도 정전과 단수로 스트레스를 받는 나의 기분을 더 속상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스트레스가 가득한 밤에 겨우겨우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전기가 여전히 아웃이었다. 그 때의 절망감이란. 전날 밤에도 물이 안 나와서 사온 생수로 겨우겨우 씻고 오늘 아침만을 희망했는데,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은 상황이 너무 힘들었다. 남자친구는 남자친구대로 전기가 없으니 재택 근무가 불가능해서 사무실로 출근해야만 했는데, 이런 상항 속에 혼자 집에 남는 것이 더 힘든 기분이기도 했다. 그렇게 일찍부터 잠에 깨서 출근 준비하는 남자친구 옆에 멍하니 있는데, 남자친구가 가방을 다 챙기고 들려는 순간, 전기가 파팟, 하고 들어왔다! 전기가 들어오는 순간 느껴지는 안도감은 정말 표현할 수가 없다. 사무실로 향하려던 남자친구는 바로 재택근무로 전환했고(ㅋㅋㅋ) 전기가 들어오자 이내 곧 수도도 돌아왔다. 모든게 돌아온 시간이 9시 30분 쯤이었으니 거의 15시간 동안 전기와 물이 없는 상황이었다. 모든게 정상 복구가 되기까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이 어제 내린 폭우 때문이었다니(폭우로 인해 전력 복구 작업을 할 수 없었다고..) 그것만으로도 새삼 최근의 상황들이 얼마나 예외적인 상황인지 알 것 같다. 영국은 단시간에 이렇게 폭우가 내린 경우가 거의 없었을 것이고(심지어 비가 주구장창 내리는 겨울~봄에도 폭우는 거의 없다.) 그에 따른 대비도 되어있지 않다는 거겠지. 오랜만에 겪는 이런 상황이(그리고 매우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런 상황이) 어제와 오늘 아침 여럿 이유로 날 힘들게 했다. 전기와 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절실하게 느낀 지난 15시간, 제발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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