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14
오늘부터 나와 남자친구의 여름 휴가가 시작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어제 저녁부터?
올해 초부터 남자친구는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 위해 여러 차례 면접을 봤다. 코로나 락다운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기도 했는데, 그에 비해 남자친구의 업무 분야는 일이 쏟아졌으니 어떻게 보면 다행인가 싶으면서도 정말 징하게 일을 많이 하긴 했었다. 새벽 1~2시까지도 일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거의 한국 회사 생활 뺨치네, 라고 느낀 적도 많았다. 게다가 지금까지 다닌 회사가 첫 직장이었고 계속해서 같은 부서엣서 비슷한 업무만을 해서 새로운 분야의 일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듯 하다. 또한 평생 직장의 개념보다는 이직이 일반적인 요즘 세상에서 5년 차의 경력을 쌓은 지금이 이직을 위한 좋은 시기이기도 했다. 그렇게 남자친구는 내가 한국을 간 사이에 몇 차례의 인터뷰를 하더니 내가 런던에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아 이직할 새로운 회사를 찾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다니던 회사와 일정을 조율하며 마무리 짓는 날이 바로 어제였다. 그리고 오늘부터 새로운 직장에 출근하기 전까지 약 4주간의 휴가가 시작되었다, (덩달아) 야호!
저녁으로 내가 만든 닭갈비를 맛있게 먹고(한국인의 후식 볶음밥까지), 축구까지 챙겨보고(아스널이 졌다고 엄청 슬퍼했음), 나와 밤늦게까지 문명 6 게임도 실컷 하다가, "내일은 알람이 필요없다!"라고 신나하면서 잠들었다. 주말은 원래 알람 없으면서. 아무튼 휴가가 시작되는 주말, 오늘부터 무엇을 할지 고민을 하는데 내가 라벤더 농장을 가고 싶다고 했다. 영국에 온 이후로 런던 가까이에 라벤더 농장이 있는 것을 알게된 후 꼭 한번쯤은 가보고 싶었는데, 매번 기회를 놓쳤었다(여름에 런던에 있었던 적이 많이 없음). 다음주부터는 두 차례의 여행을 계획해 놓았기에 시기를 놓치기 전 가능한 한 빨리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주 평일 내내 주말 날씨를 살폈는데, 비가 온다고 했다가 맑아진다고 했다가 흐리다는 다양한 기상 예보를 보여주길래, 결국에는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하늘을 직접 확인한 후 확실히 결정하기로 했다.
그렇게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는 분명 화창했던 하늘이 30분만에 흐려지는 것을 보며 나와 남자친구는 엄청난 토론을 했다. 오늘 말고 내일 가면 어떨지, 내일 한국어 수업이 있는데 그 이후에 가면 어떨지, 정 안되면 덜 복잡한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가는 것이 좋을지. 하지만 결국에는 두꺼워 보이지 않는 구름을 믿고 라벤더 농장을 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 결정은, 정말 오늘 하루 최고의 결정이 되었다.
"그래도 우리 가보자!"라고 한 결정이 후회되지 않게 영국의 날씨는 너무나도 완벽했고, 그와 더불어 예쁜 꽃과 라벤더는 우리의 시간을 행복으로 가득 채웠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는 동안 내가 남자친구에게 "Mayfield Lavender Farm은 런던 근처에 있는 작은 농장인 셈인데, 이걸 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냥 일기에만 적어야 할까 여행 파트에 적어도 괜찮을까?"라며 블로그에 관해 고민을 했더니 그가 "그래도 나름 여행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대답해 주었기에,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따로 기록하기로 했다. 하긴, 일기의 한 부분으로만 적기에는 너무 예쁘고 사진도 왕창 찍었다구. 주말인데다 요즘이 라벤더가 예쁠 시기라 사람은 꽤 많았지만, 그래도 농장이 생각보다 컸기에 안전하게 거리를 유지하면서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날씨는 맑지만 쨍한 햇살이 가득했지만 엄청 더운 날씨도 아니어서 기분 좋게 시간을 보냈다. 오늘 찍은 사진들을 보면 너무 행복해서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진들이 많았다ㅋㅋㅋ
두어시간 정도 라벤더 팜에서 시간을 보내고 우리는 금방 런던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느즈막히 일어나 라벤더 팜 일정을 급하게 결정한 탓도 있지만, 오늘 저녁에는 내가 미리 레스토랑을 예약해 두었기에 시간에 맞춰 일정을 조율해야 했다. 하지만 전혀 아쉽지는 않았다. 소풍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면 오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겠지만, 원래 계획이 예쁜 꽃 보면서 실컷 사진 찍고 서로 이야기하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기에 나와 남자친구에게는 충분히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예약해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 Luca
Address : 88 St John Street, London EC1M 4EH
Open : Wednesday - Saturday 12:00 ~ 22:00 / Sunday - Tuesday Closed
Website : https://luca.restaurant/
나는 오늘 저녁을 위한 일정을 2주 전에 미리 예약했는데, 원래는 남자친구 이직을 축하하기 위한 서프라이즈였다. 하지만 지난 주와 같이 갑작스러운 일정이 튀어나오는 경우도 종종 있기에 (특히 남자친구에게) 그냥 몇 일 비밀로 하다가 미리 말해버렸다, 하하. 게다가 괜히 설레서 못 감추겠잖아. 내가 예약한 곳은 2018년 쯤 친구가 추천해 준 곳이자, 나의 생일 축하를 받았던 곳으로 이탈리안 레스토랑 'Luca'였다. 인테리어 분위기도 예쁘고, 음식도 맛있었던 것으로 기억에 남아 남자친구에게도 소개해 주고 싶었다. 게다가 5년 동안 첫 직장에서의 수고와 새 출발을 응원하는 축하 자리인만큼 내가 한 턱 크게 쏘기로 했는데, 좋은 레스토랑에서 좋은거 먹이고 싶었다. (여담으로 남자친구가 평일에 상사와 주말 및 휴일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내 여자친구가 레스토랑을 예약해 둬서 저녁을 먹으러 갈거에요. 아마 Luca라고 했던가?"라고 말했다는데, 상사가 "어, 거기 좋은 레스토랑이야. 음식도 맛있고."라며 가본 적 있는 곳이었다는. 후후.)
저녁 첫 타임을 예약했는데, 우리가 거의 처음으로 도착했는지 테이블이 준비될 때까지 바에서 잠깐 시간을 보냈다. 식전주로 가볍게 시작해볼까, 싶어서 메뉴를 보다가 The Golden Negroni를 주문했다. 이탈리아의 iconic aperitif라고 하는데, 약간이 입맛을 돋우는 느낌은 있었지만 여전히 술알못인 나에게는 강하고 쓴 맛이었다. 이후 테이블로 자리를 안내 받았는데, 이전에는 좀 더 안쪽 테이블에 앉았었는데 오늘은 키친 앞 라운지 자리에 앉게 되었다. 코너 자리라 나름 편했지만, 괜히 안쪽 자리가 더 예뻐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이었을까. Special occasion이라고 구구절절 사연을 썼어야 했나, 라는 생각도 했지만 Introvert는 그냥 조용히 현재에 만족합니다. (물론 어느 곳이나 인테리어나 자리는 다 예쁘고 편했다. 괜한 나의 마음.)
우리는 메뉴 세 가지 정도를 주문해 같이 나눠 먹기로 했는데, Anti Pasti로 'Roast orkney scallops with jerusalem artichoke and n'duja'와 Primi로 'Taglierini of scottish lobster, smoked datterini tomatoes, tarragon and chilli', 그리고 마지막 Secondi로 'Ribeye of 40 days aged hereford beef, tropea onion, wild mushrooms and crips potato'를 선택했다. 사실 나는 여전히 레스토랑 메뉴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끼는데, 각 나라의 원어들을 메뉴 이름으로 하거나 너무 다양한(듣도 보도 못한) 재료들을 설명으로 적어 놓으면 분명 읽을 수 있는 영어 알파벳인데도 까막눈이 되기 때문이다. 영국에 막 왔을 때는 내가 아직 한참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순수 영국인인 남자친구도 "가끔 이런 단어들은 나도 몰라.."라고 하는걸 몇 번 보고는 같이 당당하게 휴대폰으로 검색해서 메뉴를 주문한다ㅋㅋㅋ 그리고 사실 전체를 이해할 필요도 없고. 중요한 부분들만 딱딱 알아채면 충분이 이렇게 맛있는 음식들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선택한 메뉴들은 정말 성공적이었다.
가리비 관자 요리는 내장의 쌉쌀한 맛도 느껴지면서 부드러웠고, 랍스터가 들어간 파스타는 진한 소스(나와 남자친구는 분명 소스를 만들 때 랍스터 껍질을 이용했을거라며 Masterchef를 보며 어깨 너머 배운 요리 팁들을 추측했다.)가 함께 어우러져 맛있었다. 그리고 40일 숙성된 립아이 스테이크는 맛이 없을 수가 없지. 고기는 엄청 부드럽고 좋았고, 진한 버섯의 향이 느껴지는 소스와 샬롯, 감자 가니쉬도 맛있었다. 은근이 배가 작은 나와 남자친구는 메뉴 3개만을 시켜 나눠 먹는 상황이었는데도 벌써 파스타를 먹을 때부터 배가 불러와서 스테이크는 겨우겨우 다 먹었지만, 정말 맛은 최고였다. 중간 중간 와인도 주문하고 "디저트는 하나만 주문해서 나눠먹을까?"했지만, 결국 티라미수와 아포가토를 각자 주문해서 마무리지었다.
기분 좋게 식사를 하고 남자친구에게는 가격이 얼마 나왔는지 보여주지도 않고 내가 결제를 했는데, 나름 뿌듯했다. 비록 내가 열심히 번 돈을 탈탈 쓴 셈이지만. 남자친구는 "같이 나눠 낼까? 너무 비싸지 않아?"라고 걱정하기도 했지만, 사실 함께 생활하면서 상당 부분을 남자친구가 부담하고 있기에(아무래도 수입 차이가 있다) 이렇게 특별한 경우에 한 턱 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또한 한편으로 나도 얼른 자리 잡아서 돈 벌어가지구 더 좋은거 사먹이고 싶은 마음이랄까. 동기 부여가 팍팍 된다.
남자친구야, 누나가 얼른 돈 벌어서 맛있는거 사줄게, 첫 직장에서 5년 동안 수고했고 새로운 출발 걱정하지 말고 기분 좋게 시작하기를! 남은 4주간의 휴가 우리 행복하게 보내자,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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