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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 모음집/예술

Barbican Centre <NOGUCHI> 전시회 후기

by kyeeunkim 2021. 11. 13.
Barbican Centre

NOGUCHI

 

2021.10.23 

  지난번 친구 소영이가 런던에 놀러왔을 때, 함께 가려고 전시회를 예약했다. 하지만 약 2주의 출장 동안 피로가 쌓인 소영이의 컨디션이 토요일 오전 무너졌고 전시회는 함께 가지 못했다. 급하게 일정이 변경되면서 예약한 전시 티켓은 취소할 수 없었기에 조던이에게 "같이 가줄래?😭"해서 함께 오게 되었다(충분히 혼자 갈 수 있었지만 끊어놓은 티켓값이 너무 아까워서...).

  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 野口 勇)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일본계 미국인 조각가이자 건축가이다. 1904년 미국 California, Log Angeles에서 일본인 아버지와 아일랜드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일본계 미국인으로서 스스로를 “소속이 명확하지 않은 사람들의 무리에 소속된” 사람이라고 표현할 만큼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탐구했고, 일생동안 작품을 통해 다양한 인종과 문화, 정체성의 통합을 추구했다.

  1924년 노구치는 Columbia University에서 예비 의과 과정을 밟는 중, 어머니의 권유로 뉴욕의 Leonardo da Vinci Art School에서 공부를 하다 조각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초상화 흉상을 만드는 작업을 했고, Logan Medal of the Arts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이 당시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작품에서 감동을 받은 그는 1927년 구겐하임 장학금(Guggenheim Fellowship)을 받고 파리로 유학을 갔다. 그 곳에서 노구치는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조수로 일하며, 초현실주의와 추상화 그리고 조각 재료에 대한 원리를 배웠다. 이후 그는 뉴욕으로 돌아와 유럽 양식의 추상 조각 작업을 이어갔지만 반응이 좋지 않았고 결국 생계를 위해 추상 예술을 포기하고 초상화 조각 제작에 전념했다.
  1930년부터 노구치는 영국, 러시아,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다양한 나라와 문화에 대해 배웠다. 런던 대영 도서관에서 아시아 철학, 예술 및 종교에 대해 읽고, 베이징에서는 중국 화가 제백석(Qi Baishi, 齊白石)과 함께 전통 수묵 기법을 배우고, 일본 도쿄와 교토에서는 젠(Zen) 스타일에 감동하며 여러 영감을 쌓는다. 1930년대 중반 노구치는 멕시코 시티에서 체류할 때 대규모 벽화 작업인 <History Mexico(1936)>를 제작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험과 기억에서 영감을 얻은 그는 공공 기념물과 정원들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 중 처음으로 널리 인정을 받은 작품은 아르데코(Art Deco) 양식의 박육조(bas-relief) 스테인리스 작품으로 1940년 록펠러센터(Rockefeller Centre)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News>이다.
  이후 노구치는 혁신적인 산업 및 인테리어 디자인으로 명성을 쌓으며 나무, 돌, 금속을 매개로 정원을 포함한 공공시설 및 사적 공간의 작업을 이어갔다. 사물의 외관보다는 본질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유기적 양식을 탐구했다.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특성은 브랑쿠시의 외에도 장 아르프(Hans Arp), 호안 미로(Joan Miró)의 영향을 엿볼 수 있고, 아쉴 고르키(Arshile Gorky)와의 두터운 우정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1982년 노구치는 Long Island에 The Noguchi Museum을 열였다. 노구치 미술관과 야외 조각 정원에는 약 500점의 조각, 모형,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내가 제시한 여러 전시 리스트 중 소영이가 최종 선택을 한건데 함께 보지 못해 너무 아쉬웠다. 나는 사실 작가 노구치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는데 전시장에서 보이는 몇몇의 작품은 눈에 익숙해 보였다(특히 아카리 등). 전시 관람 이후에 인테리어, 가구를 전공했던 친구들에게 물어봤더니 잘 아는 작가라고 했다. 이럴 때마다 내가 너무 예술 공부를 등한시했다는 것을 느껴 조금 부끄럽다. 

<Leda>, <Positional Shape>, <Globular> and <Red Seed>
<Abstraction in Almost Discontinuous Tension(Tensegrity)> and <Bucky>

  큰 전시장은 다양한 그의 작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 1~2층에 걸쳐 12개의 전시 공간(방)들이 있어 규모가 작은 것도 아니었는데 몇몇 공간들은 작품들이 빽빽하게 위치해 있었다. 구성만으로도 작가가 엄청 많은 작품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조각만 한 것이 아니고 공공 시설 및 산업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해서 활동했으니 그 규모는 더욱 더 크겠지. 미국 뉴욕에 그의 미술관이 있는데, 석재・도자기・나무 및 알루미늄으로 만든 다양한 조각품과 극장 세트 디자인, 놀이터 모델, 가구 및 조명 등 150개 이상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미리 시간을 예약한 티켓을 가지고도 입구 앞에서 한참이나 기다리다 입장했는데(이후 관람 끝나고 나오니 더 길게 줄 서 있는 사람들..) 각 공간마다 관람하는 사람들이 많아 작품 보기가 답답하고 어려울 정도였다. 아무래도 예약 및 인원 관리를 좀 못한 듯...? 그 점이 조금 아쉬웠다. 복잡한 걸 싫어하는 우리 둘은 사람 많은 곳은 좀 후다닥 스치듯이 보기도 했다😂

<Lunar Infant>, <Lunar Landscape(Woman)>, <My Arizona> and <Yellow Landscape>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 내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고, 미국 서부를 중심으로 일본계 미국인,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강제로 억류되었다. 노구치는 ‘민주주의를 위한 니세이(Nisei) 작가와 예술가’ 그룹을 결성하기도 하고 Ariozona, Poston의 가장 큰 수용소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수용자들의 삶의 개선을 위한 예술 프로그램 제작하는 등의 대응 노력을 했다. ‘혼자만의 조각가’가 아닌 ‘일본계 미국인 예술가’로서의 활동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그는 일본 어부들이 사용하던 종이 초롱에서 영감을 받아 뽕나무 종이와 대나무로 만든 접이식 조명, <Akari Lanterns(1951)>를 만들었고, 1955년 뉴욕 The Museum of Modern Art(MoMA)에서 선보이며 큰 성공을 거뒀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볼 수 있는 노구치의 작품들과 무대 디자인과 조각, 분수, 정원 등은 선종(禪宗)의 미학인 ‘와비 사비(Wabi Sabi, わび さび, 슬픈 아름다움)’와 세속적인 현대 세계의 요구가 잘 조화되어 있다.

<Contoured Playground> and <Lunar Table>, <Akari BB3-33S>

  추상적인 작품들을 좋아하지 않는 조던이는 전시를 즐기지는 못하는 듯 보였다. 아니면 예상치 못한 시간에 급하게 끌려와서 그런가?ㅋㅋㅋㅋ 나도 추상적인 작품들이 어렵긴 했지만 그저 조각과 조형물들의 형태, 배치, 질감을 보며 그 느낌에 집중했다. 인상 깊은 작품들이 몇몇 있었는데, 특히 천장 혹은 벽에 달린 조각품들이 마음에 들었다. 중력을 거부하고 공간 속에 떠 있는 형태지만 비어있거나 가벼운 느낌이 들지 않아서 그 모순적인 감각이 좋았다. 그 외에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Frontier(1935)>라는 발레 공연 영상이 있었는데, 노구치가 무대 디자인을 맡았다고 한다. 작품의 움직임과 심플한 무대가 잘 어울려서 관람을 끝내고도 계속 머릿 속에 맴돌았던 작품 중 하나였다.

<Akari 120A>, <Double Red Mountain> and <Time Lock>

  노구치는 조각이 공동의 유용성에 투영된다면 '일상 생활의 활력소'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나에게 있어 예술은 인간이 더 인간적이게 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하며 예술이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개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적, 환경적, 영적 의식을 수용하면서 그는 조각에 대한 확장된 이해를 탐구했다.

<Bell Tower for Hiroshima(Replica)> and <Bird's Nest(Nesting)>

  전시에서 엄청 다양한 그의 작품들을 볼 수 있었지만, 무엇보다 가장 유명한 것은 <아카리 등(Akari Lanterns)>일 것이다. 실제로도 전시장에는 다양한 형태의 아카리 등이 있었다. 작품의 이름 '아카리(Akari)'는 일본어로 '빛'을 뜻하며 조명과 무중력의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고 한다. 아직까지 생산되고 있다는 이 전등은 하나의 조각 작품이 아닌 실생활 및 산업 생산과 연결될 수 있어 더욱 성공적인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카리 등은 '예술'과 '디자인'이 하나가 된 것으로 대중이 접근 가능한 요소를 사용해 일상에 조각이라는 예술품을 가져왔다. 유일하고 단일한 대상만이 아닌 아이디어와 컨셉 자체만으로 독자적인 작품성과 가치를 가지고 그것으로부터 끊임없이 재생산이 되는데, 이 모든 것은 예술, 디자인, 비지니스의 경계가 무너지던 현대 사회의 변화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노구치의 '아카리 등'을 통해 여러 가지의 방식, 가치가 존재하는 현대 사회의 예술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방향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Akari 26N>, <Akari 27N>, <Akari L8>, <Akari 35N>, <Akari BB3-YA1> and <Rocking Stool in Wire Form>
Set elements for Erick Hawkins's Stephen Acrobat: <Jungle Gym>, <Hanging Tree> and Various works

  일본인 아버지와 아일랜드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노구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물론 다인종 가족은 과거에도 존재했지만, 요즘과 비교하면 그 비율이 적었을 것이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물리적 거리감이 줄어든 지금과 달리 과거에는 여행조차 힘들었을테니 말이다. 비록 '이민의 나라'인 미국은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사람들이 살지만, 지금도 존재하는 '차별'이 과거에는 더 심했겠지. 게다가 전쟁을 겪었던 그로서는 대치 관계에 있던 두 국가를 품고 있던 '중간 사람'으로서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을 보면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다양한 문화의 장점을 아주 잘 살린 것 같다. 더욱이 여행을 통해 동서양을 아울러 여러 미술 기법, 문화를 접한 그는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을 만들었다. 몇몇 작품들은 '일본스러운' 느낌을 많이 받기도 했는데, 비록 미국에서 주로 활동하고 생활했지만 일본인으로서의 뿌리도 강하게 느끼지 않았나 싶다(유년시절의 생활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고).

  예술 분야 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보면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고 그 속에서 독특한 개성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내가 누구인가'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국적과 인종 등의 영향은 적어지며 그에 대한 경계도 점점 옅어지는 듯 하다. 내가 농담 삼아 조던이에게 "우리 아이도 미래에 이런 고민을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다른 두 나라와 문화를 가진 배경이 큰 힘이 될까?"라는 말을 했는데, 새삼 궁금하기도 하다.

전시장을 가득 채우는 노구치의 다양한 작품들
<This Earth, This Passage> and <Akari 30A>

"Everything is sculpture. Any material, any idea without hindrance born into space, I consider sculpture."

Isamu Nogu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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